죄와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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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허자, 광주대각사 주지·제주퇴허자명상원장

‘죄와 벌’은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가 지은 장편소설로써 1866년 잡지 <러시아통보>에 발표된 문학걸작 중의 고전이다. 어쩌다 젊은 혈기로 죄를 지은 라스콜니코프가 양심의 가책을 느껴 사는 중에 창녀 소냐를 만난 후 정신적으로 감화되면서 결국 자수하고 시베리아로 유형의 길을 선택한다는 휴머니즘적인 스토리다. 작가가 살았던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양심적인 도덕성은 크게 변한 것이 없는 듯하지만 요즘 현대인들에게는 아무래도 그 도덕성에 대한 면역력이 너무나 강화되어 파렴치한 일들을 자주 목격함으로써 인간양심에 대한 실망이 매우 크다.

어찌하여 우리가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멀어진 부끄러움을 모르는 삶으로 전락해 버렸을까? 죄를 짓고 포토라인에 서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의 한결같은 답변으로 일관한다. ‘검사의 심문에 성실히 답하겠다’는 말뿐이다. 기자는 지금 국민을 대신해 질문을 하는데 그 답이 한 마디로 동문서답인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차라리 포토라인을 없애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 같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 자괴감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죄를 졌으면 응당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어야 할 텐데 뭣이 그리 당당한지 고개도 숙이지 않고 포토라인도 무시한 채 사라져 버리는 걸까? 그렇게 당당하다면 마스크나 모자로 가릴 필요는 뭐가 있을까? 죄의 유무는 법정에서 가려질지라도 혐의를 받고 조사를 받는 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도덕적 죄인(?)임을 명심해야 한다. 특히 공직자가 혐의를 받고 조사에 임한다면 그 자체로 공직수행에 차질을 가져오는 까닭에 이미 죄인인 것이다.

성경에 이르기를 ‘죄의 대가는 사망이라’는 말씀도 있거니와 인과응보의 법칙대로 죄의 과보는 마땅히 벌을 받게 하는 사회가 공정한 사회이며 무질서와 무법, 무규범을 예방하는 평화로운 사회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최근 크게 이슈가 되고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직권남용죄에 따른 법정구속은 사법사상 초유의 대법원장 구속이라는 불명예를 안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국민적 여망에 부응했다는 점에서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만약 판사가 영장을 기각시켰다면 얼마나 국민들로 하여금 실망과 저항, 상대적 박탈감을 주었을지 모른다. 참으로 잘 한 일이다. 마땅히 사법부의 온갖 비리에 대한 책임은 사법부 수장이 져야 한다. 대법원장이라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자고로 인간은 삼불치(三不恥)라 하여 3가지 앞에서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하나는 조상 앞에서, 둘은 자식 앞에서, 셋은 거울 앞에서가 그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역대 대통령을 역임한 사람들이 국민의 여망과 법 앞에서 자유롭지 못한 부끄러운 역사를 써가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법을 집행하는 사법부에서조차 국민들로 하여금 불신을 안겨주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현실인가? 하지만 사법부에서조차 지키지 못한 법일지라도 우리조차 포기해서는 안 된다. 국민은 법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이며 법은 또한 곧 국가의 생명이므로 죄를 지은 자 예외 없이 마땅히 벌을 받게 해야 한다.

이것이 국민과 국가가 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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