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은 신화인가 고독과 절망의 해독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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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애덕, 사회복지학 박사/논설위원

작년 혹독한 가뭄에서 거의 죽은 듯 했던 나무를 땅으로 옮겨 심었는데 겨울 찬 서리와 바람에도 작은 나무 줄기에 붉은 빛이 보였다. 이런 생명의 가능성을 주는 대지를 누가 어머니라 하였는가?

2019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신년메시지는 ‘현대사회의 유일한 해독제는 모성’이라 선언하였다. 우리 주변은 절망과 고독으로 가득 차 있는데 이런 절망과 고독을 치유할 수 있는 해독제를 모성에서 찾으라는 메시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메마르고 황량해진 사회를 반증한다.

그러나 2019년 대한민국 사회에서 ‘모성’을 강조한다면 매우 불편할 만큼 여성주의 시각은 우리사회의 주류가 됐다. 그래서 한국사회에서 ‘모성’에 대한 강조는 죽은 공자를 살리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140년 전 1879년 노르웨이 헨리크 입센의 소설 <인형의 집>은 여성운동 1기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제주의 여성 선각자 강평국 선생도 일찍이 1925년 6월 1일과 7월 20일 동아일보에 ‘女性解放의 雜感’이라는 제목으로 폭력남편으로부터 인형의 집을 뛰쳐나온 노라에 대해 ‘여성은 더 이상 남성의 노예가 아니다’라는 사회주의적 여성관을 실었다. 2차 세계대전 후 남성들이 전쟁터에서 돌아왔으니, 군수공장의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일자리를 돌려주고 ‘가정으로 돌아가라!’는 정책이 있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고학력 여성의 사회 참여가 확대되면서 1960년대 1970년대 2기 여성운동은 전통적 가족법개정과 낙태 합법화를 주도하며 세계로 확산시켰다.

이런 서구의 여성운동은 한국여성계를 움직였고 각종 여성권익을 위한 법률 제·개정 및 2005년 호주제폐지 등 가부장적 유교문화를 개선하는 원동력이 됐다. 최근 낙태 합법화 움직임 및 출산절벽 부작용 등은 이런 흐름의 총체적인 변화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 과정에 모성주의는 여성의 희생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사회적 이데올로기로서 공격의 대상이 됐고, 어머니의 희생적인 ‘모성’은 전 근대적 산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런 사회현상 중 대학생들에게 어머니하면 떠오르는 게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아이러니하게도 한 학생은 ‘눈물이 난다’, 다른 한 학생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어머니’라는 말을 해 본 적 없는 20대 한 여성은 가수 조용필의 ‘고추잠자리’ 가사 중 ‘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보고 싶지?’라는 노래 가사에서 ‘엄마야’를 부르지 못한다. 어머니를 본 적도 부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오늘 많은 청소년들은 다양한 이유로 어머니의 부재를 호소한다. 이런 공허감을 어디에서 채울 수 있을까? 그래도 어머니 하면 눈물이 난다는 한 학생의 솔직한 글은 ‘모성’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희생정신으로 무장해 우리를 길러주신 ‘장한 어머니’와 달리 우리는 너무 ‘여성주의 시선’으로 길들여져 희생하고 인내하는 따듯한 ‘어머니의 시선’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리고 ‘어머니’를 애타게 기다리는 우리 아이를 팽개치며, ‘희생적 모성’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신화이고 깨어져야할 사회적 이데올로기일 뿐이야 하며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럼에도 비옥하고 풍요로운 대지가 지구의 생명을 살려온 것처럼 수 억 년 인류를 지속시켜온 ‘모성’은 영원한 우리의 안식처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커다란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 그렇기에 메말라버린 대지에 비옥한 생명을 부르고, 고독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어머니의 측은한 시선으로 에너지를 주어 살려내라는 교황의 메시지는 울림은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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