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오랫동안 회자된 위인들…이들의 업적 제대로 알려야
(6)오랫동안 회자된 위인들…이들의 업적 제대로 알려야
  • 김정은 기자
  • 승인 2019.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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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계 이한진 유적비…신촌초 정문 앞 공원에 조성
이한진, 영주십경 이름 붙인 장본인…추사의 제자로 조선시대 제주 문인
원봉 장봉수 유적단비…구좌읍 월정리에 위치해
장봉수, 제주시 삼양동 명칭 창안…서당 열어 후학 양성 앞장
제주시 조천읍 신촌초등학교 정문 앞에 있는 소규모 공원에 조성된 매계 이한진 유적비.
제주시 조천읍 신촌초등학교 정문 앞에 있는 소규모 공원에 조성된 매계 이한진 유적비.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人死留名)’.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뜻이다.

누군가 세상을 떠난 뒤 남은 사람들이 그 이름을 기억하고 기리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다.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 명성을 좇고 성취를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 이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역사에 이름을 남기며 오래도록 회자되는 이들은 그만큼 주변인들에게 촉망받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제주지역에도 각 마을마다 조용히 회자되는 위인들이 있다.

 

제주시 구좌읍 월정리 225-6번지에 있는 원봉 장봉수 선생 유적단비.
제주시 구좌읍 월정리 225-6번지에 있는 원봉 장봉수 선생 유적단비.

그 가운데 조천읍 신촌리 매계 이한진 선생과 제주시 구좌읍 월정리 원봉 장봉수 선생에 대한 유적비가 세워져 마을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유적비는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다.

월정리 소재 원봉 장봉수 선생 유적단비는 몇 해전까지 관리되지 않은 채 잡목과 가시덤불로 에워쌓여 있었고, 왜 이곳에 비석이 조성됐는지 조차 알 수 없다.

그나마 조천읍 신촌리 매계 이한진 선생 유적비는 신촌초등학교 정문 바로 앞에 있는 소규모 공원에 조성됐고, 1999123일 당시 양행남 신촌초등학교 교장이 표지석을 세워 선생의 업적을 설명해 놨다.

그러나 이들 유적비를 문화유산으로 지정해 업적을 제대로 알리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게 제주지역 문화역사계 중론이다.

 

매계 이한진의 업적이 설명돼 있는 표지석. 1999년 1월 23일 양행남 신촌초 교장이 세웠다.
매계 이한진의 업적이 설명돼 있는 표지석. 1999년 1월 23일 양행남 신촌초 교장이 세웠다.

매계 이한진 유적비

매계 이한진 선생은 1823(순조 23) 84일에 신촌리에서 태어났다.

전라도 전주가 본관이고 대대로 신촌리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이신구, 어머니는 김해김씨 덕하의 딸이다.

선생의 아버지는 신촌리에서 서당을 열어 어려서부터 학문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또 추사 김정희 선생의 제자이기도 한 이한진 선생은 조선시대 말기 제주를 대표하는 문인 중 하나였다.

제주목사 목인배(睦仁培)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이한진 선생의 글을 보고 南道(남도)泰斗(태두)’(남쪽 섬의 학문이나 예술 방면에 손꼽을 만한 권위가 있는 사람)라고 극찬했다.

그는 제주 문인인 오태직, 김용징 등과 친분을 쌓으며 교류했고, 안달삼, 김희정, 이계징, 고영흔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1862년 강제검, 김흥채 등이 민란을 일으키자 이듬해 의병을 세우라는 격문을 지어 충의의 뜻을 유림에게 알리기도 했다.

특히 그는 영주십경(瀛州十景)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다.

바로 그 시대에 제주에서 경관이 뛰어난 10곳을 선정해 영주십경(瀛州十景)’이라 하고 시로 읊은 것. 이 후 서진노성(西鎭老星 : 서귀진에서 보는 노인성)과 용연야범(龍淵夜帆 : 용연의 밤 뱃놀이)을 더해 영주십이경(瀛州十二景)을 만들기도 했다.

1873년 제주에 유배된 최익현과 만나 우국충정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저서로 매계선생문집이 있다.

1939년 신촌리에 거주하는 선비들이 수암 강용범 선생의 글에 담긴 공적비를 신촌초등학교 자리에 건립했다.

1998년에는 신촌리 출신 김영길 교사가 매계문집 번역본을 펴내며 이한진 선생의 생애와 사상이 재조명됐다.

번역본은 김찬흡 선생이 고증했다.

이 매계문집 번역본을 통해 조선 말기 제주에 살았던 한 선비의 생활의 일면을 유추할 수 있게 됐다.

또 이 자료들을 통해 한 시대의 생활 모습을 그리고, 그 시대의 지방 지식인의 삶의 궤적을 찾아볼 수 있어 교육적 자료로 가치가 높다.

 

원봉 장봉수 선생 유적단비 뒷면. 이 비석은 마을 사람들이 장봉수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원봉 장봉수 선생 유적단비 뒷면. 이 비석은 마을 사람들이 장봉수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원봉 장봉수 선생 유적단비

원봉 장봉수 선생은 월정리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기리기 위해 유적단비를 세웠다.

유적단비는 제주시 구좌읍 월정리 225-6번지에 위치해 있다.

장봉수 선생의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제주시 삼양동에서 태어났다.

전라남도 장성(長城) 출신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이다.

1889년 박운경(朴雲景)과 함께 제주시 삼양동의 명칭을 창안했다고 한다.

조흘포(釣屹浦)와 감을포(甘乙浦) 및 매촌(梅村) 등 세 동네를 합한 ()’자와 천기(天機)의 동력인 ()’자를 합쳐 마을 이름을 지었다는 설이 있다.

또 지리방위론에 따라 해 뜨는 방향에 원당봉이 솟아 있어서 마을에 큰 인물이 나오지 못할 것을 걱정해 묘(: 북동쪽), (: 동쪽), (: 동남쪽) 세 방향을 제압한다는 의미로 ()’자와, 기상 상태의 변화를 결정지어 주는 중양(重陽: 강한 양)의 기운이라는 의미의 ()’자를 합쳐서 지었다는 설이 있다.

이후 여러 해 동안 구좌읍(舊左邑) 월정리(月汀里)에서 서당을 열고 후학을 양성했으며, 기우만의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이어 받아 제자들에게 애국사상을 강조했다.

1850년대 월정리의 마을 이름은 무주(武州)’였는데, 그가 무주리는 풍광이 아름답고 바다에서 바라보면 반달처럼 보여 월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고 해 월정(月汀)으로 바꾸었다.

그는 평생 월정에서 훈장을 하며 마을 사람들에게 예법을 가르쳤다.

비석에 유()자가 훼손됐는데, 역사학자 등에 따르면 제주4·3 때 생긴 총탄 자국으로 추정된다.

비석은 최근 돌담을 세워 정비가 된 듯한 모습이었지만 이 곳이 어떤 곳인지 알려주는 표지판이 설치되지 않은 채 덩그러니 조성돼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