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 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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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이환 수필가

나이 들면서 아내는 가슴이 답답하다는 하소연을 하는 횟수가 많아졌습니다. 예전 같으면 웬만한 오름은 거뜬히 올랐는데, 요즘은 낮은 오름도 힘겨워합니다. 오늘따라 나 역시 무릎이 시큰거립니다. 열심히 달려온 나의 건각도 이제 힘이 부쳐가는 모양입니다.

우리 집은 나를 포함하여 남자만 셋 입니다. 이 녀석들이 아침시간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저녁이 문제입니다. 정성스럽게 차려준 엄마의 저녁밥을 잘 먹고는 슬쩍 일어나서 소파에 앉아 TV를 보던지, 아니면 제 할 일을 합니다. 식사 후 뒤치다꺼리를 하는 아내 보기가 민망스럽습니다. 아내도 교직에 있었기 때문에 힘들기는 그 쪽이 더 할 텐데 아내는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습니다. 연로한 어머니마저 앓아눕는 일이 많아지면서 아내는 더욱 분주해졌습니다. 나는 오직 직장에 충실할 뿐입니다.

이제 아들 둘 장가보내고, 어머니는 하늘나라로 먼 여행을 떠나셨습니다. 우리 부부 둘만 남았습니다. 둘만이 생활하면서 우리 부부의 생활에 달라진 점이 하나있습니다. 아침식사가 끝나면 나는 앞치마를 두르고 설거지를 합니다. 아내는 식사 차리는 것으로 끝입니다. 내가 설거지하는 동안 아내는 커피 한 잔과 신문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고, 주방에서는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옵니다. 아침 설거지는 내가 한다고 공언을 해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설거지를 처음 시작할 때는 솔직히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두라고 할 줄 알았습니다. 손을 대면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아내가 나의 설거지를 그대로 용인할 리 없기 때문입니다. 나 역시 대충 넘어가는 일은 없습니다. 물비누로 정갈히 씻기, 식기건조기에 질서 있게 늘어놓기, 싱크대 청소하기, 식탁을 깨끗이 닦기, 행주 잘 접어 말리기 등이 주요 심사 내용인데 이것 모두 아내의 기준을 통과한 모양입니다.

설거지 경력 10년이 훌쩍 지나갑니다. 설거지를 하다 보니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아내의 단점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합니다. 식사를 준비하면서 그릇 하나로도 될 일을 두 개, 세 개 늘여놓아 나의 설거지를 방해하는 것, 행주도 하나면 될 텐데 여러 개를 사용하여 설거지 하는 사람을 귀찮게 하기 등. 우리 두 사람만의 설거지라야 간단하기 때문에 후딱 끝납니다.

그러나 특별한 음식을 할 때는 설거지하기가 여간 복잡한 게 아닙니다. 또 다 비워주면 좋겠건만, 버리긴 아깝고, 망설여지게 하는 음식이 꼭 남아있습니다. 그럴 때는 예전에 어머니들이 그렇게 했듯이 입으로 가져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방안에서는 아내가 열심히 얼굴에 뭔가를 바르고 있습니다. 외출을 준비하는 모양입니다. 설거지를 하는데 뒤에서 말소리가 들립니다.

거기 세탁기에 빨래 넣어뒀으니까 이따가 다 되면 널어줘요.”

성당 레지오 모임이라든가 아내의 친목모임이 있는 날은 어김없이 집을 나서면서 할 일을 추가해놓고 나갑니다.

설거지 후에 깨끗하게 정리된 그릇들을 보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내일 아침엔 식탁을 깨끗이 닦고서 며칠 이런저런 일로 멀리했던 책도 읽고, 마음에 낀 녹을 벗겨내야겠습니다. 사실 연애를 시작할 때 사랑은 거창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살아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아내는 대단한 거 바라지 않았습니다. 청소하기, 설거지 할 때 도와주기, 집에 좀 빨리 들어오기 등 사소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거창한 내 삶의 철학에 막혀 한쪽 구석에 처박아 놓고 살았습니다.

오늘에 와서야 문득 삶의 진리 하나를 캡니다. 마주 앉아 밥 먹고 설거지 함께 하며 사는 이 순간이 사랑을 완성하는 시간이라고. 문득 이영옥 시인의 부부가 생각납니다.

우리는/서로 다른 사람/다른 성품으로 만났으면서도/용케도 이제껏 살아냈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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