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제주 최후의 한학자…영주음사 사장으로 문우들과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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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영, 일본 오사카서 항일운동
김귀택, 황해도 옹진 우후 재임돼
김규임, 첨지중추부사 등 역임해
김균배, 후진들에 한문 교육 앞장
김근시, 제주주조·상선회사 사장
김기량, 세레명 ‘펠릭스 베드로’…한국 천주교 순교 복자 124인에 포함
일제강점기 제주측후소 방면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행은 김균배는 1927년 제주성안 칠성로에서 수생당(壽生堂)이라는 한약방을 경영했다. 이후 영주음사에 출입하며 한시 짓는 문우들과 어울렸고 1958년 영주음사 사장이 됐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일제강점기 제주측후소 방면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행은 김균배는 1927년 제주성안 칠성로에서 수생당(壽生堂)이라는 한약방을 경영했다. 이후 영주음사에 출입하며 한시 짓는 문우들과 어울렸고 1958년 영주음사 사장이 됐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김귀영金貴榮1911(일제강점기)~1948(미 군정시대), 일본 오사카에서 전협 및 일본 공산당의 항일 활동.

본관은 김해. 김귀영은 산북 애월읍 하귀리<귀일>에서 태어나 보통학교를 졸업, 19234월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을 했다.

19332월 전협全協 일본 오사카지부에 가입, 또 이 무렵 일본 공산당 북지구 조직원 가와가미<川上謙一郞일본인>의 소개로 입당했다.

혁명화를 위해 활동을 하던 중 동년 126일에 검거, 1228일 기소됐다.

해방 이후 정부가 수립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여수·순천 10·19 반란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19481019일 전라남도 여수시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4연대에서 좌익계열의 장병이 일으킨 사건이다.

필자의 변 : 김귀영과 나의 외숙은 조국 광복 직후 오사카에서 운영하던 회사를 전남 여수시 덕충동 옛 비행장 터로 이설했다. 그리고 이곳을 공생共生기계 주식회사로 명명했는데, 사장에 김귀영(하귀), 이 공장장에 백창영白昌永(엄리)이 임명 중이었다.

김귀택金貴澤무신. 황해도 옹진甕津의 우후虞侯, 제주목 목안 태생으로 1781(정조5) 무과에 급제하고 관직은 황해도 옹진甕津의 우후虞侯(조선 시대 무관직)로 재임했다.

무신 김귀택은 쌀을 실은 배가 칠산七山 앞 바다에서 파선당하는 경우가 많자, 1786(정조10) 10월에 나주의 제민창濟民倉으로 운반하여 들여 줄 것을 요청했고 윤허를 받은 후 부터는 파선되는 폐단이 없어졌다.

김규임金圭任1825(순조25)~1908(융희2), 무신. 명월만호, 대정현감.

자는 계현季賢이고 본관은 김해, 김치윤金致潤의 아들로 조천읍 조천리 이동梨洞坡 김씨에서 태어났다.

1861(고종5) 무과에 급제, 1883(고종20) 4, 신재호愼哉祜의 후임으로 부임하고 18845월에 떠났다.

18809월 백용진白龍鎭의 후임으로 명월만호에 도임하고 오위장을 거쳐 1882년 첨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했다.

사직대제·석전제·성황발고제·여제厲祭의 초순제初巡祭 및 이순제二巡祭 초헌관은 모두 대정현감 김규임이 맡았다.

김균배金勻培1888(고종25)~1982, 한학자. 자는 홍여洪汝, 호는 근재勤齋 또는 행은杏隱 혹은 행하노인杏下老人. 중등교장 김용택金龍澤(북촌부산대 수학과 졸)의 조부.

본관은 김해. 조천읍 북촌<->에서 태어나 어릴 때는 향리의 숙사塾師에게 한문을 배웠다.

행은 김균배는 1916년부터 후진들에게 10년 동안 한문을 가르치고 1927년 제주성안 칠성로로 옮겨 수생당壽生堂이라는 한약방을 경영했다. 1952년 이후 영주음사瀛洲吟社에 출입하며 한시 짓는 문우들과 어울렸다.

그는 1958년 영주음사 사장이 되어 면헌勉軒 김정언金廷彦(곽지)과 함께 고시필考試筆을 잡아 시평詩評에 전념했고, 이후 본도 최후의 한학자라고 일컬어졌다.

저서로는 한적 필사본인 일기日記안부해본고安浮海本稿가 있다.

김근시金根蓍1875(고종12)~1956, 한말韓末의 관리. 일제 강점기의 사업가.

자는 경구景龜, 호는 우국又菊. 본관은 경주이며 난곡蘭谷 김양수金亮洙의 아들로 제주-성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충청남도 사립 옥성玉成학교를 졸업하고 한말에 제주재판소 검사시보檢事試補를 거쳐 제주목 주사를 발령받은 연후, 여러 차례 전남도회全南道會 평의원에 당선됐다.

1906년 정의군 주사를, 1914년 제주군 서기를, 1915년 제주도 서기와 참사를 역임했다.

1920년에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이 설립 인가되자 이사理事로 천거됐다.

그는 1935년 이후 사업에 몰두해 제주상선회사 사장, 제주면업綿業회사 사장, 제주주조酒造 사장, 소화昭和운송대표, 제주도해조海藻대표 등을 맡았다.

김기량金耆良1816(순조16)~1866(고종2), 어부漁夫, 제주 최초의 천주교 신자. 천주교 순교자殉敎者.

세례명은 펠릭스 베드로. 조천읍 함덕리<서산> 태생이다.

본시 어부였던 김기량은 1856(철종7) 서해 바다에서 문영환文英煥(삼양), 박윤근朴潤根(건입), 한행문韓行文(월정), 문광철文光哲(동복) 등과 함께 장사 차 서귀진에서 출항하고 모슬포로 오던 중 풍랑을 만나 중국 광동廣東 해역까지 표류, 마침 영국 선박에 의해 구출돼 홍콩으로 옮겨졌다.

이곳에 와 있던 페낭(Penang) 신학교(神學校)의 조선인 신학생으로부터 천주교의 가르침을 받아 영세를 받았다.

그는 1858년 귀국해 서울에서 페롱(Feron) 신부와 최양업崔良業(토마스) 신부를 만나 교회 서적을 얻고 제주도로 들어와 신앙을 전파하는 데 힘써 40여 명을 입교하게 했다.

김기량은 제주의 신자들을 보살펴 줄 신부를 파견해 주도록 베르뇌(Berneux) 장주교張主敎에게 요청해 승인을 받았다.

1866(고종2) 병인박해丙寅迫害로 이 약속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박해가 한창일 때 새로운 신자들을 영세시키기 위해 출국하려다가 마침 경남 통영統營 앞 바다에서 관헌에게 체포됐고 모진 고문 끝에 가슴에 대못[竹釘]에 박히는 처형으로 순교를 당했다.

이로부터 40여 년이 지나 제주에서는 활발한 선교가 이루어졌다.

201481610만 인파가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한국의 천주교 순교 복자福者 124명이 탄생됐는 데 제주출신으로는 김기량 혼자 포함됐다.

시복諡福이란 가톨릭 교회가 거룩한 삶을 살았거나 순교로 인해 이름 높은 이에게 복자라는 칭호를 주어 특정교구나 지역 등 안에서 공적인 공경을 바칠 수 있도록 허가하는 교회의 공식 선언을 말한다.

 

제주시 조천읍 함덕중학교 인근에 건립된 김기량 순교 현양비.
제주시 조천읍 함덕중학교 인근에 건립된 김기량 순교 현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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