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과 반쪽짜리 시민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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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정, 일본 치바대학교 준교수/논설위원

일본에 거주하는 필자는 지난 주말 동일본대지진 이후 오랜만에 정전을 경험했다. 일본은 지진이나 태풍으로 인해 가끔 정전이 발생하는 경우는 있지만, 그날은 재해도 발생하지 않았는데 한 구역 전체가 정전되는 일이 발생했다. 원인은 전기를 공급하는 전력소에서 일어난 화재였다.

정전이 일어나던 저녁 무렵 필자는 백화점 안에 있었다. 갑자기 백화점의 실내조명이 꺼지더니 매장 전체가 암흑세계로 변했다. 쇼핑 중에 갑작스럽게 발생한 정전이라 놀라기도 하고 처음 겪는 일이라 순간 황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필자를 놀라게 한 것은 정전이 아니라 갑작스럽게 발생한 정전을 대하는 일본사람들의 태도였다. 쇼핑을 하던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저 차분히 각자 쇼핑하던 위치에서 묵묵히 다시 불이 켜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우왕좌왕하는 사람도 없고 누구하나 갑자기 발생한 정전 상황에 대해 직원에게 물어보거나 하는 사람도 없었다. 누가 보면 정전이 마치 일상화돼 있어 그렇게 행동하는 것처럼 착각할 정도다.

전기는 20분이 지나도 복구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여전히 사람들은 차분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가정집도 회사도 아닌 사람이 북적거리는 백화점에서 그것도 주말 저녁시간에 발생하는 정전은 자칫하면 큰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 도난사건이 대량으로 발생했을 수도 있다. 지진이나 재난 시에는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지시에 따라 행동해야한다는 교육이 몸에 밴 탓이었을까? 기다리는 동안 만약 똑같은 상황이 다른 나라에서 일어났으면 어떠했을까 생각해 본다.

30분이 흐를 무렵 전기는 무사히 복구됐고 기다리던 사람들은 다시 쇼핑을 하기 시작했다. 그날 밤 지역뉴스에는 저녁에 있었던 정전사고 얘기가 짤막하게 나왔고 정전으로 인한 큰 사건·사고는 없었다. 순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또 얼마나 질서정연하게 움직였으면 사고하나 없었을까 싶어 다시 한번 놀라기도 했다.

이런 상황 들으면 누군가는 일본사람들의 성숙한 질서 의식을 떠올렸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질문하지 않는 일본 사람들의 모습을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고 소극적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정전이 발생한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왜 복구시간이 길어지는지 자체전력은 왜 가동이 되지 않는지 언제쯤 복구가 되는지 등 문제점을 지적하고 해결책에 대해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기 때문이다. 필자에게는 둘 다의 모습으로 비쳤다.

한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시민의식이 발전해야 한다. 그리고 시민의식이 발전하고 유지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예의, 질서의식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과 타인을 위한 그리고 사회를 위한 끊임없는 문제제기도 필요하다. 문제의식이 없으면 문제를 제기할 수 없고 문제를 제기할 수 없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듯이 위기상황에서 문제제기는 단순한 소란이 아니라 위기상황에 대한 진단과 해결책으로도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의 지진이나 재해등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질서의식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다. 이번 역시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처하는 자세는 성숙한 질서의식을 보여줬다. 하지만 아쉽게도 문제제기는 없었다. 상황에 따라 필요할 수 있는 개개인의 문제제기가 질서의식이라는 모습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면 그 시민의식은 아마도 반쪽짜리이거나 행동하지 않는 집단의식으로만 끝나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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