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뜨거웠던 항일 정신 깃들어…문화유산적 가치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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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읍 교래리 소재 백응선 묘비
만세운동 주도한 동지들이 세워
일제 시선 피해 현재까지 잘 보존
함덕리사무소 인근 ‘동지애도비’
독립투사 한영섭·김재동 등 기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동시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뜻 깊은 해다.

정부를 비롯해 각 지자체 종교계, 시민단체 등이 3·1 운동 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발족해 대한독립만세함성이 터져 나온 그날을 기리고자 한다.

제주지역에서도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통치에 대항해 조천만세운동, 법정사 항일운동, 해녀 항일운동 등 대규모 독립시위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조천만세운동은 1919321일 제주시 조천읍 미밋동산 등에서 김장환 등 선각자 14명이 서당생도와 주민 등 500여 명을 모아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쳤던 제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이다.

이를 시작으로 19458월 해방이 될 때까지 지역 곳곳에서 항일운동은 이어졌다.

이런 가운데 주목되는 비석이 있다.

바로 조천읍 교래리 소재 백응선 묘비와 조천읍 함덕리 비석거리에 위치한 동지애도비.

두 비석은 독립운동가의 비석이다. 문화유산으로 가치가 높아 재조명 해본다.

동미회(同味會)가 건립한 백응선 묘비

조천읍 출신 백응선(1896~1920)은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투사 14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묘비는 제주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 산 137번지에 위치해 있다.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해 있다.

백응선은 1919321일 제1차 조천 만세시위운동에서 9명이 체포된 후, 박두규·김필원과 함께 322일 제2차 시위를 주도했다.

그러나 제2차 시위에서 박두규·김필원이 체포됐다. 323일 제3차 시위가 조천장터에서 일어났고, 시위대는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함덕리까지 행진했다.

백응선은 김연배·이문천 등과 3차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됐다.

1919426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6월 형을 선고받아 항소했지만 5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됐다.

출감 후 고문 후유증으로 6개월 후인 19203284살 된 딸 하나를 남겨 두고 25살에 요절했다.

1921년 투옥 동지 13명은 동미회(同味會, 미밋동산의 동지)라는 친목 모임을 만들고 백응선을 기리는 비석을 묘지에 세웠다.

비석 정면에는 고백응선군지묘(故白膺善君之墓)’라고 쓰고 측면에는 13명의 동지의 이름을 썼다. 글은 김시범이 썼다.

백응선 묘비의 비문은 잘 찾아볼 수 없는 곳에 세워져 있어 선전독립(宣傳獨立)이란 단어가 기록돼 있어도 일제의 눈을 피할 수 있어 지금까지도 잘 보존돼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2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후 광복회가 새로운 비석을 세워 주겠다고 했지만 백응선 묘비만 현충원으로 옮겨가면 부친의 묘만 남게 돼 옮기지 못했다. 비석 모조품이 제주항일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백응선 묘비는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어 방치되고 있었지만 제주지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며 기록을 남기고 있는 제주흥사단 문화유산답사회(회장 고영철)가 매년 묘비를 정비하고 있다.

 

공을 기린 비석들 사이에 선 동지애도비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사무소 맞은편에 비석들이 나열돼 있어 눈길을 끈다.

이 비석들은 공을 기린 이들을 위해 세운 것이다.

이 가운데 붉은 글씨로 차디찬 흰 빛 밑에 늘니인 무리들아 고함처 싸워라고 피 흘린 동지였다라고 선명하게 새겨진 비석이 있다.

19311월 일본 도쿄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21살에 요절한 한영섭의 시신이 고향인 함덕리에 오자 김두성 등 사회주의 계열 함덕청년동맹원들이 장례를 치렀다.

김일준·송건호 등 청년동맹원들은 각각 소정의 돈을 내 비석을 매입해 앞면에는 동지적광한영섭기념비(同志赤光韓永燮記念碑)’, 뒷면에는 차디찬 흰 빛 밑에 늘니인 무리들아 고함처 싸워라고 피 뿌린 동지였다는 항일의식이 들어간 비문을 새겨 317일 비를 세웠다.

이후 경찰이 함덕리에 형사들을 파견해 비를 세운 지 얼마 안된 329일 청년 20여 명을 검속했고, 이후 비를 압수하고 비를 세운 김일준, 부생종, 김재동, 양공근, 김두성, 고종건 등을 보안법 위반으로 검거해 재판에 회부했다.

이로 인해 김두성이 최고형인 징역 16개월, 고종건·김일준·양구문·김진희 등은 각각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이를 비석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 비석은 제주4·3 당시 사라졌었는데, 1980년대에 고증을 거쳐 다시 건립한 것이다.

다시 건립할 때에는 함께 독립운동을 했지만 공훈록에 등재되지 못했던 김재동·부생종·송건호 세 명을 추모하는 뜻에서 한영섭의 묘비에 새겼던 비문을 똑같이 새겨 다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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