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감, 그 아린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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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선 수필가

겨울 햇살이 차실 깊숙이 들어왔다.

눈을 뜨면 오디오를 켜고, 뜨거운 물을 머그잔 가득 따라놓은 다음, 묵상하듯 앉아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것으로 아침을 연다. 잔잔하게 퍼지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선율이 창밖의 숲을 깨우니, 아린 기억하나가 손에 잡힐 듯 실바람 속에 흔들린다.

 

내 고향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은 고즈넉한 시골마을이었다. 전기가 들어와 있는 면소재지 까지는, 신작로가 펼쳐진 비포장도로를 한 시간 남짓 걸어서 가거나, 간간히 있는 버스를 타야만 갈 수 있었다. 취학 전이니 혼자 힘으로는 갈 수 없는 아득한 도시.

 

한 여름 태양이 머리 위를 내리 쪼이던 한 낮, 지루함을 이기지 못해 동네 가운데 있는 들마당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나가보니 친구들은 보이지 않고, 낯선 자전거 한 대가 그늘에 세워져 있었다. 아이스케키(아이스케이크) 장수가 들어온 것이다. 여름 내내 한 두 번 볼 수 있으면 횡재에 가깝다고 느낄 정도로 보기 힘든, 달콤한 것이 시원하기까지 하는 그 아이스케키가 아저씨 자전거 위 궤짝에 들어있었다. 하늘을 날 것 같은 마음을 꾹 참으며, 당찬 발걸음으로 아저씨에게 다가가 고물도 되나요?” 하고 물으니 아저씨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뿔싸! 큰일이다. 어린 내 능력에는 우리 방앗간에 있는 베어링을 가져오면 엿장수에게 크게 먹히던 고물이었는데, 그래서 내심 당차게 물었건만, 방금 입안에 들어온 아이스케키가 날아가는 듯 했다. 상심하는 나를 본 아저씨가 웃는 얼굴로 내려다보며 하는 말이 땡감을 따오면 아이스케키를 준다고 하였다. 순간, 잘못 들었는가 싶어 다시땡감이요?”라고 물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뒤 돌아볼 여유 없이 꿀맛 같은 상상을 하며, 탐스런 궤짝을 뒤로한 채 집으로 내달렸다. 집에는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집안일을 도와주는 노루실댁이 계셨다. 방앗간에서 일하시는 머슴아저씨까지 더하여, 손가락을 접어가며 세어보니 여섯 개 정도가 있어야만 내 몫으로 두 개가 돌아왔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으니 냉장고는 없었고, 숫자가 잘 맞아야 녹아서 없어지는 불상사를 면할 수 있었다. 어린 나는, 집안 어른들에게 요즘 말하는 서프라이즈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감나무 밭으로 가면서도 몇 번이나 손가락을 다시 접어 보았다. 그러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나의 세상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땡감이 생각만 해도 침이 고이는 아이스케키와 바꿔진다는 것이다. ‘조금 전에 다시 물어보았을 때도 땡감이라고 했다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면서 감나무 아래 도착하니 생각보다 높은 곳에 감이 달려있었다. 울타리 밑으로 장대 하나를 찾아 들었는데 온몸이 장대의 무게에 휘청거렸다. 꾀를 내어 감나무에 등을 바짝 붙여 몸을 기댄 다음 장대를 잡아 올리니 한결 나았다. 온 몸으로 내리치고 다시 하기를 얼마나 반복 하였는지 팔은 덜덜거렸고, 얼굴엔 땀으로 세수를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덕분에 제법 수북이 땡감을 땄다. 치마에 주워 담아 들마당으로 뛰어가니 궤짝도 아저씨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너무 당황스러워 이 골목 저 골목을 뛰어 다녀 보았으나 여전히 없었다. 쿵쾅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호흡을 가다듬고 귀를 기울이니, 자전거 덜컹거리는 소리가 아득히 들리는 게 아닌가. 안간힘을 모아 다시 소리 나는 쪽으로 달려가니 다른 마을로 가는 길목인 서당마루를 넘어가고 있는 궤짝이 아슴푸레하게 보였다.

 

짧은 다리로 또 땡감의 무게로 고갯마루까지 가기엔 너무나도 먼 곳, 욕심만 적게 부렸어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나지 않고, 온통 서러움만 가득했다. 전깃불도 없는 밤처럼 가슴이 캄캄하고, 온 몸의 맥이 풀려버린 나는 도랑가에 땡감을 쏟아놓고 장승처럼 선 채 서당마루를 바라보며 뜨거운 눈물을 훔쳐내고 있었다.

 

오래전 기억이지만, 오늘밤엔 기필코 달콤하고 맛난 아이스바를 수북하게 쌓아 놓고 입안이 얼얼하도록 먹어 봐야겠다. 그리고는 가슴속 응어리진 아린 기억의 영혼을 불러내어 말해줘야지

울지 마, 괜찮아. 지금의 내가 과거의 너에게 아이스케키 열 개 백 개 먹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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