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제주 유림의 리더…향교에서 근대교육 최초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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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범, 서울 고학당 항일활동
김기성①, 뛰어난 글로 ‘소문 자자’
김기성②, 대정현감 도임
김기추, 독립운동가…불교 지도에 힘써
김기수①, 제주대동학교·중학원 개설
김기수②, 법정사 항일운동
제주향교 문묘와 동무, 서무의 모습으로 중앙에 있는 건물이 대성전이다. 제주향교 직원(直員) 김기수는 유림의 리더로서 향교에서의 근대 교육을 병행하기로 하여 1907년 사립 제주대동학교를 제주향교의 부설로 개설했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제주향교 문묘와 동무, 서무의 모습으로 중앙에 있는 건물이 대성전이다. 제주향교 직원(直員) 김기수는 유림의 리더로서 향교에서의 근대 교육을 병행하기로 하여 1907년 사립 제주대동학교를 제주향교의 부설로 개설했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김기범金基範1911(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제주보통학교 맹휴 및 서울 고학당苦學堂에서 항일활동.

가명 고윤기高崙起, 본관은 김해이나 1983년 경주 김씨로 호적을 정정했다.

김기범은 유명한 한학자이며 서당 훈장인 묵농墨農 김종현金鍾炫의 아들로 제주시 삼도리<향청->에서 태어났다.

그가 192811월 제주공립보통학교 5학년에 재학할 때 동교의 맹휴盟休 사건으로 고태륜高泰崙, 신영두愼永斗() 등과 함께 퇴학당하고 검거된 적이 있었다.

이들의 요구는 친일파 교사를 축출할 것, 교내에 부착된 선전물 전단을 보여줄 것 등 여러 가지 조건을 걸고 맹휴를 단행했는데 그 배후에는 제주청년회 간부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후 샛별소년단의 지도에 임하다가 19304월 서울에 올라가 사립 숭인崇仁학교 고학당 2학년에 편입했다. 이 무렵 사회주의에 관한 서적을 탐독해 공산주의에 공명하고 고학당의 동료 학생들과 함께 항일 학생운동을 전개하던 중 19323월에 체포당했다.

1932919일 경성지법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선고 받았다. 그는 출옥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아통항東亞通航의 자주운항에 참여하며 계속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김기성金箕性①:1828(순조28)~1869(고종6), 서예가. 자는 중구仲具, 본관은 광산이며 제주시 오라리<오라위>에서 태어나 문행文行으로 알려졌다.

김기성은 글씨를 잘 써서 유명했으며 글씨로 잘 알려진 후손들이 배출됐다.

김기성金基成②:1853(철종4)~1931(일제강점기), 무신. 대정현감. 일명 김기생金基生, 구좌읍 한동리<-> 태생이며 무과에 급제했다. 본관은 광산, 김경룡金鏡龍의 아들이다.

1886(고종23) 5, 윤정식尹正植의 후임으로 도임해 동년 12월 부친상을 만나자 떠났다.

 

제주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여 조회하는 모습. 이 학교가 개설되자 김기수를 통해 제주향교 부설로 개설된 대동학교는 일제의 간섭으로 폐교됐다.
제주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여 조회하는 모습. 이 학교가 개설되자 김기수를 통해 제주향교 부설로 개설된 대동학교는 일제의 간섭으로 폐교됐다.

김기추金基秋1908(융희2)~1985, 불교 지도자. 본관은 김해, 호는 백봉白峯. 10세 때까지 제주도에서 자라다가 11세 때 부산으로 이주, 그 곳에서 영도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제이상업학교에 전학했다.

김기추는 이 학교에서 조선사를 교과목에 삽입시킬 것과 일본명으로 된 학교명을 우리말로 바꿀 것을 요구하는 교명 바꾸기 운동을 일으켰으며, 일본 현역 군인이 출장해 군사교육을 시키는 것도 반대했다.

이 운동이 교외적校外的, 집단적 문제로 확산되자 퇴학처분을 당했다.

그는 20세가 되기 전에 25세 이하의 청년들로서 구성된 청년동맹에 가입해 민족적 대동단결과 조선민족의 해방에 힘을 기울이기 위해 청년동맹위원장의 직위를 맡았다.

그뒤 자금 마련을 위해 행상을 하는 한편, 19272월에 발족한 신간회新幹會 조직과도 관계를 맺는 등 은밀히 활동했다.

1928년 초에는 일본의 사상범에 대한 검거 선풍에 의해 체포돼 치안유지법위반죄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광복이 되자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간부로 가담했다가 당시 미 군정청에 의해 구금을 당했고 2년 동안의 감옥살이를 하며 채근담벽암록碧巖錄을 읽고 불교에 눈을 떴다.

1963년 대전의 심광사心侊寺에서 도반들과 선수행禪修行의 결사를 맺고 입정에 들어 7개월 만에 오도悟道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 뒤 서울·인천·경기도 일대에서 모임을 가지고 그의 뜻을 따르는 사람을 지도했다.

1969년에는 대전 심광사에 머물면서 금강경’, ‘유마경을 강의했다.

이후 부산 남천동 산 중턱에 보림선원寶林禪院을 설립하고, 그 곳에서 수행자들을 모아 매년 선수련법회를 열어 선리禪理를 가르쳤다.

저서로 금강경강송金剛經講頌등이 있다.

김기수金基銖①:1866(고종3)~1948(미 군정기), 제주향교의 직원直員. 유림의 영수, 자는 덕원德源, 호는 죽헌竹軒. 세종의원 원장 김순택의 조부.

본관은 나주이며 제주시 영평<가시나->에서 태어났다.

한말에 제주군 주사로 재임하고 제주군 중면中面(현 제주시) 면장을 지냈다.

나라가 망하자 이응호李膺鎬(오라)가 영도하는 집의계集義契 동지들과 어울리면서 면암勉菴 최익현을 사숙하고 귀양살이 온 김윤식金允植, 박영효朴泳孝 등과도 교유했다.

서울을 출입하면서 민족주의 사상에 젖어 계몽 사업에 뜻을 두었다.

김기수는 유림의 리더로서 향교에서의 근대교육을 병행하기로 하여 1907년 사립 제주대동大東학교를 제주향교의 부설로 개설, 처음으로 향교에서 신식교육을 실시했다.

대동학교의 교장은 김기수, 교감校監 겸 강사는 김상수金庠洙, 강사는 진찬엽陳贊燁, 정대집鄭大集 등이었다.

같은 해 공립 제주보통학교가 개설되자 일제의 간섭으로 대동학교는 단명으로 폐교됐다.

죽헌은 뜻을 굽히지 않고 19312월 향리에 보성의숙普成義塾을 개설, 숙장으로서 후원 기관인 교육보성회를 조직해 많은 기부금을 모아 운영했다.

광복이 되자 그는 향교 수반인 광재廣齋 양기은梁基殷(노형)과 함께 194512월 향교 부설 제주중학원을 개설하고 제주향교재단을 구성해 초대 이사장에 현경호玄景昊(노형)를 추대하고 중학교로 승격시켰다.

김기수金基洙②:1888(고종5)~1975, 무오년 법정사의 항일운동. 본관은 광산, 김윤겸金允謙의 차남, 중문면 월평리에서 출생, 1926년 대정면 영락리로 이적. 앞서 그는 191924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징역 1년을 언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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