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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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희 수필가

  퇴근길의 연북로는 차가 꽤 붐빈다. 출퇴근 시간대는 되도록 피해 다니는데 어쩌다 다섯 시를 훌쩍 넘겨서 이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꾸물꾸물 기어가던 자동차는 연북로 장례식장 앞에서 신호에 걸리고 말았다. 장례식장으로 들어가려는 차와 나오려는 차 우회전 차량들이 복잡하게 몰려 있는데 한 젊은이가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낯익은 얼굴이라 가만히 살펴보니 바로 장례식장 소속의 장의사였다.

  그를 처음 만난 건 사년 전 한림에 있는 호스피스 병동에서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대략 한 시간 여, 그들은 연락을 받자마자 바로 왔다. 밤 두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동생과 나는 황망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데 그들은 차분하면서도 엄숙하게 아버지의 시신을 모시고 갔다. 내게 돌아갈 차가 있냐고 물어보던 젊은이의 얼굴이 생생히 기억이 난다.

  밤 세시 가까운 깜깜한 장례식장, 젊은 장의사는 안치실의 벽에서 서랍하나를 열어 아버지의 시신을 모셔놓고 문을 닫더니 두 손을 문에 기댄 듯 잡고 잠시 멈췄다가 한발자국 물러나 목례를 하였다. 그 모습은 영화의 한 장면 같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는 그 때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시신이 차가운 냉동실에 들어가서 어쩌나 하는 생각도 물론 하지 못했다. 그보다는 절을 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몇 발자국 뒤에서 그를 따라 절을 하며 아버지 시신에 절을 하는 그가 고맙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장의사 하면 별천지의 사람들이라 여겨졌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관심 가져 보지도 않았었다. 예전 장동건이라는 배우가 출연한 친구라는 영화에서 본 장의사의 모습이 뇌리에 남아있는 전부였다. 주인공의 불우한 성장기를 상징하듯 주인공의 아버지 직업이 장의사였다. 다소 어두운 이미지로 묘사됐었기에 나 역시 장의사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장례를 치르며 나는 그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입관 전 사무실에 잠깐 갔는데 사람들이 많이 들락거려서인지 사무실 안은 시끄럽고 소란스럽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그런 부산스런 사무실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한 쪽 켠 책상에서 기도하듯 가만히 앉아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저 사람들은 어찌 좀 다른데?’ 라고 생각했었는데, 잠시 후 아버지 시신을 염하려고 온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시신을 염하기에 앞서 마음의 준비를 하느라고 그리했으리라 생각하니 그들이 더없이 고마웠고 직업정신이 훌륭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유족들이 볼 수 있게끔 염습실은 커다란 통유리로 구분되어 있었다. 마지막 작별의식을 치르고 우리는 커다란 유리를 가운데하고 염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다. 그들은 시신을 직접 보지 못하게 커튼으로 가리고는 마치 살아있는 사람 목욕시키듯 구석구석 씻기기 시작하였다. 우리 일곱 남매의 마음이 다 들어간 듯 그 손놀림은 공손하면서도 매우 정교하였다. 시신만 겨우 가린 커튼은 우리도 직접 염에 동참하는 것 같은 생각을 들게 해주었다. 아버지는 병동에 있을 때 목욕 봉사하는 사람들이 깨끗이 씻어 주어 고맙다고 몇 번이나 말하곤 했었다. 아마도 마지막으로 당신의 몸을 씻겨 주고 곱게 단장까지 해주는 그들에게도 틀림없이 고마워하면서 영원의 길을 가셨을 것이다. 아버지 목욕한번 제대로 해드리지 못한 후회는 염습사들이 머리 샴푸부터 시작하여 발끝까지 그리고 수의를 입혀드릴 때까지 그들의 정성스러우면서도 숙련된 손놀림으로 위로를 받았다. ‘아버지 난 절대 이만큼 잘 하지 못 할 겁니다.’ 스스로 변명하며 위안을 삼았다. 어머니는 그들이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염하다. ‘성품과 행실이 높고 맑으며 탐욕이 없다청렴하다와 비슷한 말.

  스마트폰에서 염하다를 검색하다보니 다른 한자어로 이런 뜻도 나왔다. 장례 한 번 치른 것으로 그들의 성품과 행실을 논할 수는 없겠지만 그 뜻풀이가 왜 자꾸 맴도는지 모르겠다.

  예전, 아직 장례식장이라는 것이 생기기전에 친정 할머니와 시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친척 어른 중에서도 다소 명망 있는 분이 오셔서 염을 주도했었던 기억이 난다. 삼십여 년 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환갑을 넘긴 아버지셨지만 황망하여 떨리는 손으로 친척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염을 하고 수의를 입혀 드렸었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란 말이 실감난다. 우리는 슬픈 가운데 온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면서 아버지의 마지막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두 손을 모으고 경계에 선다. 떠나고 보내드리고, 삶이란 이 과정의 반복이 아닐까?

  결혼식에는 웨딩플래너라는 이들이 있어 신랑신부들을 도와주고 그들의 출발이 더 한층 빛날 수 있도록 해준다. 한 생을 살다 간 분들도 결혼식 못지않게 호사를 누리며 마지막 길을 가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일곱 자식의 뒷바라지는 누구 못지않게 훌륭히 하셨지만 당신을 위한 일에는 검약하고 인색하기조차 했던 아버지, 아버지는 장의사들의 손길로 곱게 단장하고 소천하셨다.

  하얀 천으로 얼굴을 덮는 손이 성스럽다. 드러나진 않으면서도 꼭 필요한 숨은 도움의 손, 그윽한 순간의 과정을 한 걸음 한걸음 내딛게 하는 영원한 이별의 조력자이다.

  장례식장에 조문 갈일이 생길 때면 젊은 장의사를 떠올리고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기대해보기도 한다. 어쩌다 그와 마주 칠 때면 안치실 앞에서 절을 하고 염하기에 앞서 조용히 준비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잠깐 멈춰 선다. 몇 번 보지는 못했지만 언제나 양복을 입은 단정한 모습이다. 활기가 넘치는 걸음은 아니지만 신중하고 조신하다. 그와 같은 장의사들이 많이 나오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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