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日 관제조합 횡포·착취에 맞서…주민 12명 유죄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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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행, 정의현감·명월진 수군만호
김기현, 한방의원으로 유명해
김기형, 日 어민에 대한 항일운동
김기호, 명월만호…전미 200석 기부
김기홍, 제주판관…호적 수보 경비 지원
김기휴, 대정현성 청풍당 개건
김길두, 부산시 교육위원 등 역임
김길호, 소설집 해외문학상 등 수상
테우로 자리 조업을 하는 모습으로 1929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생활상태조사에 실린 사진이다. 김기형은 일본 어부들의 유자망 어업으로 인해 연안 어족이 고갈되자 추자 어민들의 생존권 문제를 들어 항일 활동을 벌였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테우로 자리 조업을 하는 모습으로 1929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생활상태조사에 실린 사진이다. 김기형은 일본 어부들의 유자망 어업으로 인해 연안 어족이 고갈되자 추자 어민들의 생존권 문제를 들어 항일 활동을 벌였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김기행金沂行1808(순조8)~1870(고종7), 무신. 정의현감. 조천리 태생, 본관은 김해, 전 정의현감 김종관金鍾輨의 아들, 전 대정현감 김기휴金沂休의 형이다.

1846(헌종12) 명월진 수군만호를 거쳐 1853(철종4) 구병우具秉愚의 후임으로 도임했다. 자는 원유元有, 1836(헌종2) 무과에 급제했다.

김기현金沂鉉1847(헌종13)~1886(고종23), 문인, 고종 때의 한방의원漢方醫員으로 유명하고 아울러 서당 훈장. 본관은 광산이며 애월읍 곽지리<답단이>에서 김경집金景集의 차남으로 어머니는 풍기진豊基秦씨이다.

서울 출입이 많아 흔히 서울 선비라는 별칭을 받았다.

김기현은 납읍리<과납>의 큰 진사라 불리는 정헌靜軒 김용징金龍徵의 문하에서 한학을 배웠다.

글씨는 예서隸書를 문장은 부를 잘 지었다. 훈학을 하면서 한의술에 능했고 만학으로 과거에 응시, 1886년 무과 병과丙科에 합격했다.

이 해 여름 호열자가 극심할 때 서울에서 이 병에 걸려 별세했다.

당시 곽지리 경민장警民長 김명관金明寬(1850~1939)은 정기선定期船으로 호남 군산群山을 거쳐 제물포로 지나 한양으로 올라가 공을 운구運柩해 왔다.

같은 마을에서 1886년 두 달 사이에 김기현金沂鉉과 문인 장봉구(1825~1886)가 타계하자 곽지마을의 이름난 무인武人·문인文人이 함께 떠났다고 아쉬워했다.

형 대현大鉉은 납읍경 배한이-드르에 묘지를 보고 장지를 마련했다. 이후 후손에 의해 2014년 어음리<비멘이> ‘빌레-경 광김묘역光金墓域으로 이묘했다.

※ 필자의 변 : 추사 김정희가 제주 유배중 서예 수제자인 곽지리 박계첨의 집에 묵게 되니, 당시 마을 유지이고 훈장인 김경집金景集이 찾아가 정중히 글씨를 부탁했다. 당시 써준 병풍서屛風書를 기현공沂鉉公과 손자 재천공在天公, 증손 정언공廷彦公, 현손 동익공東翼公까지 이어오며 잘 보존되다 남문통 종손宗孫 집에서 도난을 당했다. 이 내용을 잘 알던 나는 너무나 충격을 받았다.

김기형金奇馨1904(광무8)~?, 일본 어민에 대한 항일 활동. 추자면 영흥리<-구미> 태생이다.

193278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그와 함께 12명이 유죄 언도를 받았다.

수형자 중 김봉수金奉守, 박병석朴炳碩 등은 징역 7개월을, 김기형金奇馨, 이사문李仕文, 추남수秋南洙, 김득수金得守, 박천석朴千石, 원일개元一凱, 고일주高日柱, 원용현元容賢, 박복순朴福順, 고태욱高泰旭 10명은 징역 6월에 집행 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그들은 일본 어부들의 유자망流刺網 어업으로 인해 연안 어족이 고갈되자 추자 어민들의 생존권 문제를 들어, 항일 활동으로 발전됐다.

이는 19265월 관제 어업조합의 횡포와 착취에 대한 저항운동으로 일어난 생존권 투쟁에 이은 폭발이었다.

김기호金基鎬1853(철종4)~?, 무신. 명월만호, 본관은 김해이며 효자 김치화金致和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하고 모슬포진 조방장·명월만호·충청도 공주 중군中軍(장교)이었으니 중군은 그 지역 군영의 대장隊長이다.

그는 1877(고종14) 322일 김기반金基磐의 후임으로 명월만호에 도임하고 18782월에 그만두었다.

그는 동년 9월에 전미 200석을 진휼 사업에 보태기도 했다.

제주판관 김기홍의 절목.
제주판관 김기홍의 절목.

김기홍金基洪제주판관. 1871(고종8) 12, 김병수金炳洙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8745월에 떠났다.

재임 중인 1873년 늠미廩米를 염출해 호적을 수보하는 경비로 쓰도록 각면, 각리 단위로 분급 지원했다.

또한 1873년 제주목의 좌면左面·우면右面을 모두 신구新舊로 각기 분면分面 했다.

187311월 최익현崔益鉉이 제주로 유배됐을 때 동년 12월 제주의 호수는 12169호이고, 남자 39965, 여자 47962명이다.

김기휴金沂休1813(순조13)~1895(고종32), 무신. 철종 때의 명월만호 및 대정현감. 전 정의현감 김종관金鍾輨의 아들로서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 무과에 합격. 김기휴는 명월만호·대정현감·나주진 우영장겸토포사羅州鎭右營將兼討捕使·전라도 부안의 격포진 수군절제사格浦鎭水軍節制使·중추부사中樞府事 등을 역임했다.

명월만호 재임 중 1855(철종6) 1월부터 동년 3월까지 명월진의 군기軍器를 새로 갖추고 또 청사를 개건했다.

1858(철종9) 3, 강이진康履鎭의 후임으로 대정현감에 도임하고 185912, 제주암행어사 심동신의 안핵으로 파직됐으나 백성들이 아쉬워했다. 대정현감으로 재임 중 1858년 대정현성 안에 있는 윤경당潤經堂 동쪽에 청풍당淸風堂이 있었으니 이를 개건했다.

1855(철종6) 5, 명월진 만호 김기휴는 복냉증腹冷症으로 직무를 지행할 수 없으니 부득이 파출됐다.

김길두金吉斗1926~. 구좌읍에서 태어나 단국대학교 정치학과를 나와 부산에서 해운업으로 성공, 부산시 교육위원과 재부산제주도민회 회장으로 신망이 두터워 오래 역임했다.

 

소설집 ‘이쿠노 아리랑’
소설집 ‘이쿠노 아리랑’

김길호金吉浩1949~?, 재일교포 소설가, 제주시 삼양<-> 출신, 소설가. 1973년 병역을 마치고 도일했다.

1979현대문학’ 11월호에 단편 오염지대초회 추천推薦. 1980년 오사카 문학학교 1년 과정을 수료했다.

1987문학정신’ 8월호에 단편 영가로 추천 완료. 2003년 인터넷 신문 제주투데이에서 김길호의 일본이야기컬럼을 연재했고, 한국문인협회, 해외문인협회, 제주문인협회 회원이다.

중편 이쿠노 아리랑으로 2005년 제7회 해외문학상, 200716회 해외한국문학상을 수상했다.

1996년 일본 중앙일간지 산케이<産經>신문 주최 한국과 어떻게 사귈 것인가에서 소논문 1위로 입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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