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전 재산을 가톨릭재단에 기부…히포크라테스 정신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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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영, 유배 중 제주 민란 가담
김낙행, 효행과 문장 솜씨로 유명
김남식, 창씨개명 거부 ‘日에 투쟁’
김남윤, 창의병 일으켜 민란 수습
김남호, 서울대 의대 교수·제주 1호 의학박사
김남헌, 흉년에 곡식 희사
1979년 8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팀이 내도해 제주지역 구순구개열 어린이 환자를 대상으로 시술하고 있는 모습. 서울대 의대 교수를 역임한 김남호는 서울 종로구 도렴동에 30여 년간 김남호의원을 개업, 내과의사로 유명세를 떨쳤다.(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1979년 8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팀이 내도해 제주지역 구순구개열 어린이 환자를 대상으로 시술하고 있는 모습. 서울대 의대 교수를 역임한 김남호는 서울 종로구 도렴동에 30여 년간 김남호의원을 개업, 내과의사로 유명세를 떨쳤다.(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김낙영金洛榮?~1898(광무2), 한말의 의금부도사. 유배인.

1896(건양1)에 일어난 이근용李根鎔(일명 李根澤) 역모 사건에 연루돼 같은 해 5510년 유형流刑을 선고받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898(광무2) 3월 방성칠房星七은 민란을일으키기에 앞서 유배 중인 적객謫客들을 포섭하려고 했다.

이때 호응해 가담한 사람이 김낙영金洛榮과 최형순崔亨淳이었다.

이들은 각각 좌우대장左右大將이 되어 이른바 어남군御南軍을 지휘했다. 이들은 제주-을 점거하고 관리들을 응징했다.

김낙행金樂行1708(숙종34)~1766(영조42), 학자. 유배인. 본관은 의성, 초명은 진행晉行, 자는 퇴보退甫, 또는 간부艮夫, 호는 구사당九思堂. 아버지는 교리 성탁聖鐸이다. 경상북도 안동 출신.

이재李栽의 문인으로 김낙행은 근사록近思錄’, ‘심경心經등에 조예가 깊었다.

1737(영조13) 김낙행 아버지가 홍문관 교리로 재직하던 중 사도세자의 추존 문제로 무고를 받고 있던 이재를 변호하다가 탄핵돼 제주도에 유배됐고, 그는 아버지를 따라 제주에 갔다.

그 뒤 아버지가 광양에 이배돼 죽자 고향에 돌아가 장사지냈다.

그는 효행이 지극하고 문장으로 이름이 났으며, 특히 제문에 뛰어나서 구제밀찰九祭密札의 미칭美稱이 전한다.

저서로는 계몽질의啓蒙質疑’, ‘기법질의耆法質疑’, ‘상복경전주소통고喪服經傳註疏通考’, ‘강록간보고의講錄刊補攷疑’, ‘구사당집九思堂集등이 있다.

김남식

김남식金南植1919(일제강점기)~1989, 서귀포에서 항일활동. 본관은 김해, 김한천金漢天의 아들로 전라남도 해남군 산이면 노송리에서 태어났다.

김남식은 일찍이 서귀포로 거소를 옮겨 천주교 신자로서 홍로성당烘爐聖堂에 소속되어 나신부羅神父(본명토마스 다니엘 라이언)의 일을 도우며 어렵게 살고 있었다.

일제당국은 1940년 한국인에게 소위 창씨개명創氏改名이라 해서 일본식 이름으로 바뀌도록 강요해 본도에서도 99.9%가 이에 마지못해 응했으나 그는 끝내 창씨개명을 거부해 일본국민이 아님을 천명했다.

김남식은 1942102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육·해군형법 위반으로 금고 6월형을 선고받는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 광복절에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김남윤金南胤1843(현종9)~?, 창의병倡義兵. 본관은 김해이며 제주시 이호리<->에서 김성범金晟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868(고종5) 무과에 급제하고 담기膽氣가 과인해 항상 정의감에 불탔다.

1898(광무2) 방성칠房星七이 민란을 일으켜 민심이 흉흉했다.

이에 그는 대정현감 송두옥宋斗玉, 정의현감 홍재진洪在晋 등과 함께 창의병을 일으켜 민란을 수습했다.

조정에서는 공을 세운 송두옥, 홍재진, 김남윤 등 3명에게 가자加資하도록 했다.

그의 형 진사 김병윤金炳胤은 글씨를 잘 썼으며 그의 아들 김창호金昌鎬는 제주군수를 역임, 또 김창호의 아들 김정순金正舜과 김정로金正魯는 일제강점기를 통해 민족해방 운동에 몸을 받쳤다.

김남호金南鎬1908(융희2)~1993, 의사. 교수. 독지가. 본관은 김해. 제주시 용담동<-독이>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김창덕金暢德 교수 등 슬하에 둔 3남 모두가 아버지 김 박사와 같은 길을 택해 소문난 내과의內科醫 가족이다.

또 김 박사의 친형 김봉호金鳳鎬1918년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도일, 동경고사東京高師를 졸업한 수재로서 당시 한국유학생회 회장까지 역임하였던 인재였다.

광복 후 제주지방법원장을 역임한 김영호金榮鎬와는 종형제 사이이다.

김남호는 19273월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교육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해 전라남도의 초등학교 교사로 재임했다.

의술을 터득하기 위해 1936년 경성京城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의 병리病理 및 내과에서 10년간 연구 끝에 19457월 동 대학의 의학박사 학위논문이 통과돼 본도 최초의 의학박사가 되었다.

서울대 의대 교수를 역임한 뒤에 서울 종로구 도렴동에 30여 년간 김남호의원을 개업, 내과 의사로 유명했고 가톨릭에 귀의, 많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1991년에도 전 재산을 가톨릭재단에 내놓고도 타인에게 숨겨 가족들만이 알고 있었다.

199327일 새벽 타계하기 직전 현재 가치로 따지면 수 백억원에 달하는 경기도 일산一山의 땅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써 달라며 가톨릭재단에 기부하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평소에도 서울대학에 수 천만원을 장학금으로 내놓던 김 박사는 종로구鍾路區 통인동通仁洞에 있는 3칸 짜리 한옥에서 부인 오언남과 함께 소박하게 살며 항상 버스로 나들이했다고 한다.

병원을 운영하면서도 가난한 환자에게는 인술을 펼쳐 히포크라데스의 정신을 구현하는 데 힘써 왔다.

부인 오할머니는 행려병자行旅病者의 시신을 직접 염해 주며 명복을 빌어주는 보이지 않은 사랑을 실천한 여성으로 알려졌다.

김남헌의 교지.
김남헌의 교지.

김남헌金南獻1676(숙종2)~1727(영조3), 무신. 자선가. 본관은 경주이며 남원읍 의귀리<->에서 헌마공신 김만일의 현손으로, 또 김우천金羽遷의 아들로 태어났다. 1708(숙종34) 무과에 급제했다.

1720(숙종46) 전라도 장흥군의 벽사찰방碧沙察訪을 역임하고 1724(경종4) 흉년에 이재민들에게 비휼곡備恤穀으로 1340여 섬을 희사해 진휼에 보충한 것이 전라감사 김조택金祖澤에게 알려져 표창을 상신한 것이 이듬해에 특별 포상으로 표리() 한 벌을 하사 받았다.

이로써 그가 살던 마을이 의귀衣貴<옷귀>라고 명명되고 하사된 옷은 현재 태흥리에 거주하는 자손 김윤부金潤富가 소장 중이다.

영조英祖대왕이 김남헌에 옷을 하사하며 내린 글=“벽사찰방 김남헌에게 유하노라. 지금 본도 감사 김조택의 필진畢賑 장계를 본즉 마정감봉을 수거修擧하고 사비 곡물을 1340여 석을 진곡에 보충했으니 실로 가상해 특별히 표리(옷의 겉감과 안집) 일습一襲을 하사하니 너희는 그를 영수하라. 선예先例에 의해 유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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