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과 두 개의 리퍼블릭(Repub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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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수, 리쓰메이칸대학 국제관계학부 특임교수/논설위원

한국의 현행 헌법 전문에는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이는 문재인 대통령의 ‘3·1절 100주년 기념사’에서도 강조되었다. 즉 3·1운동의 “그날 우리는 왕조와 식민지의 백성에서 공화국의 국민으로 태어났습니다. 독립과 해방을 넘어 민주공화국을 위한 위대한 여정을 시작”했으며 “그 첫 열매가 민주공화국의 뿌리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것이다.

일본 도쿄 간다(神田)에서의 조선인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으로 비롯된 3·1운동은 독립을 갈망하는 한민족의 단호한 의지를 온 세계에 과시하면서 아시아의 민족운동을 크게 고무한 세계사적인 거사였다.

또한 3·1운동은 위에 대통령의 언급에도 있듯이 항일민족운동의 전환점이 된 사건이기도 하다. 3·1운동을 계기로 민족운동의 주된 조류는 독립 왕조의 재흥을 내건 소위 복벽(復)운동이 쇠퇴되면서 국민이 참된 주권자가 될 “Republic(중국식 번역으로 ‘민국’, 일본식으로는 ‘공화국’)”을 지향하는 운동으로 개편된다. 3·1운동 이후 국내외에 다양한 임시정부수립의 움직임이 통합되어 태어난 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였다.

다른 한편으로 3·1운동은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이나 일본에서의 ‘쌀 소동’ 등 대중 운동의 성장과도 더불어 일제강점 하 조선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대두하는 전기가 되었다. 1925년에는 김재봉·박헌영 등 ‘화요파’ 중심의 공산주의조직이 ‘조선 공산당’으로서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지도기관(코민테른·Comintern) 승인을 얻었고, 1930년대에는 중국 동북지역에서 양세봉·김일성 등이 중국공산당에 소속하면서 항일 유격 투쟁을 벌였다. 일본에서는 공산주의자나 아나키스트들이 항일민족운동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렇듯 3·1운동을 계기로 분화된 항일운동의 양대 세력은 해방된 조국이 통일된 민주국가가 됐으면 통합된 정치사회 속에서 서로 경합하는 정치세력이나 양대 정당으로서 공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 미소 냉전의 최전선에 놓인 한반도에서 결과적으로 이 양대 세력이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리퍼블릭을 만들어 내는 기반이 되어버렸다. 한쪽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나라의 정체성으로 삼고, 다른 한쪽은 1930년대의 만주에서의 ‘혁명 전통’을 나라의 정체성으로 삼고 있는 셈이다.

이 ‘정체성’들 사이의 간격은 너무나도 크다. 북한은 3·1운동을 일제식민지통치에 항거한 거족적 반일애국항쟁이라 높이 평가하면서도 ‘혁명적 당의 지도’를 결여해 ‘결과적으로 실패한 운동’이라 하고 있다.

심지어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일부 부르주아 민족운동 분자들이…사대주의적인 매국배족행위를 감행했다’(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조선전사”)라고 더 이상 없는 표현으로 깎아내리고 있다.

올해 3·1절 100주년은 남북 화해 시대 문턱에서의 3·1절이 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기념사도 그러한 새로운 시대에 임할 의욕에 넘쳐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국민통합의 역사적 뿌리를 상기시키면서 남북의 정체성을 둘러싼 깊은 간격을 재차 부각시킨 것 같은 느낌을 금할 수 없다.

이 간격을 어떻게 메워 가는 것일지는 근현대의 역사 정립을 둘러싼 탐구의 자유가 확보된 한국의 역사학자나 정치인들의 몫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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