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가난에도 그리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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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일이 힘들고 고생스러움을 ‘간난(艱難)’이라 한다. 앞뒤에 ‘ㄴ’이 겹치면서 동음생략으로 탄생한 말이 ‘가난’이다. 그러니까 가난의 본딧말은 간난이라 고유어가 아닌 한자어다. 어려움을 겪으며 고생한다 할 때는 간난신고(艱難辛苦)라 하면서 얼굴을 바꿔 가난으로도 쓰인다. 흥미롭게 만들어진 말이다.

이 가난은 ‘빈곤’으로도 쓰이면서 그 의미가 점차 넓혀졌다. 인간다운 최소한의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물적 자원이 부족한 상태가 빈곤이다. 오늘날 빈곤은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으로 그 지평을 넓혀 가는 모양새다. 삶 자체를 위협하는 수준의 절대적 빈곤, 곧 결핍 문제가 남아 있긴 하나 빠르게 감소돼 가고 있다. 하지만 상당히 증가하는 계층 간의 불평등 문제가 새로운 사회적 갈등의 요인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음도 간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른바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것. 물질만이 아닌, 지적·정서적 빈곤과 그것의 악순환으로 이어지는 양상이라 여간 심각하지 않다.

1950~1970년대 중·후반은 참 가난했다. 국민 모두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연명하던 때다. 헐벗음과 굶주림이 그야말로 한빈(寒貧)이었다. 고구마나 감자 따위가 끼니를 때워 주는 구황(救荒)작물 구실을 톡톡히 했다. 우리는 지금도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의 갈피 속에 아프게 기억한다.

나도 절대빈곤의 그 시대를 몸으로 때워 온 세대다. 들에 나는 무릇을 고아 먹고 새순과 야산의 열매로 빈 배를 속였다. 어머니가 손수 바느질로 떠 준 무명옷을 입고 학교에 다녔다. 질리게 신던 고무신을 운동화로 바꿔 신은 건 중학교에 입학하면서였다. 가맣게 때 묻은 손등이 부끄러웠지만 물이 귀한 데다 목욕물을 데워 줄 손도 겨를도 없었다. 사람들이 호구책으로 죽자 사자 밭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래도 초년고생 돈 주고도 못 산다고, 웬만한 어려움은 고생으로 생각지 않고 풍진 세상에 뿌리박아 산다. 참아내는 내성(耐性)이 생겼다. 좀 해선 병원에 가려 않는 것도 그 빈곤의 시대를 건너 온 사람의 표징일지 모른다. 방임했다 몸에 암 덩어리를 키울 걸 빤히 알면서도 그런다.

가구점에서 무슨 영업사원까지 직장을 열다섯 곳이나 전전하다 노래를 부른다는 대중적 소리꾼 장사익 씨. 마흔여섯에 데뷔를 했으니 어간에 고통의 시절을 견뎌 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대표곡 ‘찔레꽃’에 서린 한(恨)이 어찌 우연일까. 어려웠던 그의 시간이 밑거름이 됐다. 인생을 먼저 배운 그는 눈물의 인생을 노래한다.

대한민국 외식업계의 대부라는 백종원 씨도 포장마차로 시작했다고 한다. 서빙에서 장보기며 요리에 이르기까지 혼자 해야 하는 일. 하루 네 시간을 자며 버텼다며 말한다. “거저 얻는 성공은 없습니다.” 중고차 딜러 하던 때는 중고차회사가 말한 정보만 믿고 차를 팔았다 거짓이 드러나 손님에게 뺨을 맞기까지 했다지 않은가. 성공신화를 쓰고 있는 그에게도 굴곡진 인생사가 있었다.

신경림의 시 <가난한 사랑의 노래> 한 구절이 떠오른다.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로 그려 보지요.” 가슴 서늘하다.

가난은 돈지갑 앞에 굴복한다지만, 어찌 그러랴. 그래도 자존은 지켜야지, 젊은이여, 그 가난을 그리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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