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백범의 혼 서린 임정 청사…독립운동 성지로 서다
(10)백범의 혼 서린 임정 청사…독립운동 성지로 서다
  • 좌동철 기자
  • 승인 2019.03.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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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도심 뒷골목길에 위치
1993년 韓·中 정부 공동 복원
옹포 문덕홍, 김구선생 경호실장
귀덕 조봉호, 군자금 모금 운동
가파 고수선, 국내 연락 업무 맡아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에 있는 백범 김구 선생 집무실. 밀랍인형으로 제작된 김구 선생이 놓여 있고, 그 시절 임정의 모습을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다.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에 있는 백범 김구 선생 집무실. 밀랍인형으로 제작된 김구 선생이 놓여 있고, 그 시절 임정의 모습을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다.

1919411. 100년 전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임시정부가 만든 첫 임시헌법에 의해 대한민국 국호가 이때 탄생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대한제국을 다시 찾는다는 의미로 대한을 따왔다.

대신 백성이 주인임을 천명하기 위해 제국은 민국으로 고쳐 나라 이름을 다시 지었다.

임시정부는 왕이 통치하는 군주제에서 벗어나 민주 공화제를 만천하에 천명했다.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로 한국인들이 입장하는 모습.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로 한국인들이 입장하는 모습.

고단했던 임시정부 시절=상하이 노만구 마당로(馬當路) 306-4. 도심의 뒷골목, 낡고 허름한 3층 빨간 벽돌 건물에 임시정부 청사는 자리해 있었다.

연간 25만명이 방문하는 이곳은 1989년 상하이 정부의 도시개발계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으나 한국과 중국 정부가 함께 노력해 1993년 청사를 복원했다.

1층 입구로 들어가면 누렇게 바랜 태극기와 함께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의 흉상이 방문객들을 맞이했다.

당시 집무실 모습이 밀랍인형으로 재현됐고, 침실과 부엌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었다.

전시관에는 임시정부 청사 시절에 사용된 가구와 서적, 사진 등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정부청사라는 무게감과 달리 건물 내부는 협소했고, 나무계단은 좁고 가팔라서 이동에 불편을 겪었다.

한때 1000여 명에 달했던 상하이 독립운동가 수는 점차 줄어들어 겨우 수십 명에 불과한 시절, 임정 요인들은 풍찬노숙을 견뎌야 했다.

이들은 채소 쓰레기 더미에서 배추 껍질을 주워 시래깃국을 끓여 연명하고, 소금물에 절인 김치를 먹어야 했다.

백범이 찾아오는 이라고는 경찰과 세금 독촉하러 오는 사람 뿐이라고 말할 정도로 고단했던 시절을 겪은 임정 청사는 지금은 독립운동의 성지로 각인됐다.

세계만방에 존재감 알려=192612월 국무령에 취임한 김구는 침체한 임정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

애국단의 대표적 활동은 윤봉길 의사(1908~1932)의 거사로 꼽힌다.

훙커우공원(현 루쉰공원)에서 1932429일 일제는 상하이사변 승리와 일왕 생일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었다.

윤 의사가 폭탄을 던지면서 일본군 대장과 일본인 거류민단장이 즉사했고, 여러 명이 중상을 입었다.

국민당 총통 장제스는 중국의 100만 대군이 못하는 일을 한국의 한 의사(義士)가 해냈다며 격찬했다.

홍커우공원 의거를 통해 임정의 존재와 영향력은 세계만방에 알렸다.

그러나 거사 이후 거세진 일제 탄압을 피해 임정은 항저우로 이동했다.

이후 전장, 창사, 광둥, 류저우, 치장을 거쳐 1940년 충칭에 이르기까지 2100에 달하는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은 411일로 확정돼 올해 100주년을 맞이했다.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임시공휴일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

임시정부 청사 현관에 내걸린 태극기와 백범 김구 선생 흉상.
임시정부 청사 현관에 내걸린 태극기와 백범 김구 선생 흉상.

임시정부를 도운 제주 인사들=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제주 출신 인사는 3명이다.

대표적인 인물은 제주시 한림읍 옹포리 출신의 문덕홍 지사(1902~1949).

1939년 강제 징용으로 일본 선박의 선원으로 일했던 그는 1940년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했다.

그는 광시성 유림·계림 전투에서 일본군을 무찌른 전공으로 부대장으로 승진했다. 1944년 임시정부 재무부 총무과와 서무국에서 일을 하다가 1945년 임시정부 주석인 김구 선생의 경호실장으로 임명됐다.

한림읍 귀덕리 출신인 조봉호 지사(1884~1920)는 평소 뜻을 나누던 동지들과 독립희생회를 결성, 임시정부 선포문과 통신문을 전달하며 군자금 모금 운동을 벌였다.

50일 동안 도민 4450명으로부터 1만원을 모금해 19195월 상하이 임시정부에 송금했다.

당시 쌀 한 가마니가 4원으로, 2500가마니에 해당했던 거금이었다.

19197월 이 사실이 드러나 관련 인사 60여 명과 함께 검거되었으나, 조 지사는 전적으로 책임을 떠맡으면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20438세 나이로 대구형무소에서 눈을 감았다.

가파도가 고향인 고수선 지사(1898~1989)19193월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서 국내와 연락하는 사무를 맡았다.

군자금 모집을 위해 같은 해 11월 귀국해 370원을 모금해 송금했다.

요주의 인물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자, 임시정부 요인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요시오카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된 그는 가혹한 고문을 받고 귀국한 후 제주에서 첫 여성 의사이자, 사회사업가로 삶을 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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