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우리는 우리 배로…제주~오사카에 교룡환을 취항시키다
(78)우리는 우리 배로…제주~오사카에 교룡환을 취항시키다
  • 고동수 기자
  • 승인 2019.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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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녕, 제주판관·사재정 등 역임
김노현, 향해 합격…글씨 수련에 전념
김늠, 병마절도사 등 지내
김달관, 재일 도민회 고문·조선인연맹 위원장
김달준, 신간회 오사카지회 간사로 ‘맹활약’
김대근, 前 숭실대학교 총장
제주항 여객부두에 마중 나온 사람들의 모습이다. 사람들 바로 뒤에 매표소가 있고, 건너편으로는 주정공장과 고구마 저장소가 보인다. 민족계몽운동가 김달준 등은 1931년 제주-오사카 항로에 교룡환을 취항시켰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제주항 여객부두에 마중 나온 사람들의 모습이다. 사람들 바로 뒤에 매표소가 있고, 건너편으로는 주정공장과 고구마 저장소가 보인다. 민족계몽운동가 김달준 등은 1931년 제주-오사카 항로에 교룡환을 취항시켰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김녕金寧 : 문신. 제주판관. 진사시에 합격하고 벼슬은 사재정司宰正에 이르렀다.

1409(태종9) 4, 진준陳遵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4118월에 공정부사共正副使로 떠났다.

1409년 조정에서는 12월 제주자제들이 시위侍衛하는 일을 허락했다.

제주자제란 제주목사가 제주·정의·대정 세 고을에 사는 사람 중에서 벼슬할 만한 자를 선택, 관찰사에게 상주하고, 병조에서 명부를 작성했다.

매일 출근, 집무하는 일을 했고, 그 인원은 30명이었다.

김노현金魯鉉1845(헌종11)~1882(고종19), 서예가. 자는 군현君賢, 호는 우재愚齋 혹은 국사菊史, 본관은 김해이며 제주 성안에서 김구오金九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구오는 추사 김정희金正喜를 사사해 그를 으뜸가는 문하생으로 키워 글씨가 유명해졌다.

부친의 영향을 받은 김노현은 1875(고종12) 향해鄕解에 합격하고 이후 글씨 수련으로 일관했다.

1958년 12월 14일 니이가타(新寫)에서 청진淸津으로 출항하는 제1차 북송선의 모습.
1958년 12월 14일 니이가타(新寫)에서 청진淸津으로 출항하는 제1차 북송선의 모습.

김늠金凜무신. 제주판관. 진도에서 김수생金水生의 아들로 태어났다.

1626년에 무과에 급제, 1633년 황준진관 병마절도사, 1637(인조15) 6, 송겸宋謙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63910월에 떠났다.

김늠은 평담平潭 진관 병마절도사, 삼화부사三和府使, 제주판관, 재령군수 등을 역임했다.

16367월 체찰사 김유金瑬가 제주에서 궁전弓箭을 만들어 조정에 수송하도록 제의했다.

그러자 비변사에서 이듬해 4월 논의가 있었다. 즉 제주에서 올라오는 활과 화살은 병자호란으로 길이 막혀 서쪽 변방에 전해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제주가 당시 무기 생산의 중요한 지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김달관金達寬1900(광무4)~1980, 계리사計理士, 재일 제주도민회 고문, 본관 광산, 文簡공파 한란이 모루파 애월읍 하귀리<귀리>에서 김기섭金基燮의 큰아들로 태어났으며 항일운동가 김달준金達俊의 재종형, 그는 제주농업학교를 마쳐 상경해 휘문徽文고보를 마쳤다. 재일거류민단 감찰위원장과 고문을 지냈다.

그는 1927년 도쿄고상高商(一橋대학)을 졸업해 1941년 일본 계리사 자격 시험에 합격한 뒤 가네미츠<金光>계리사 사무소를 개업, 19458, 일본이 패전하니 재일교포 200만의 권위權益을 위해 동 10월 조선인연맹 오사카지부 위원장에 당선됐다.

19506조국통일촉진전국협의회가 결성되었을 때에 그는 중립계를 대표했다. 19556월 조국통일 촉진협의회가 결성돼 중앙위원 18명이 선출, 제주 출신으로는 김달관과 김민화金玟華(조천) 양인이 뽑혔다.

이어 간사이<관서> 지방 한국인 건국협회위원장, 재일거류민단감찰위원회 의장 등을 지냈다.

한편 그의 외아들 김용욱金容郁은 서울대학 물리학과를 거쳐 미국 미시간대학을 졸업, 미국 오하이오주립州立대학 주임교수, 물리학박사로 미국 물리학회의 정회원이 되어 학자로서의 인정을 받았다.

필자의 변 : 애월읍 하귀리<귀리>는 한반도로부터 일찍 선진문명을 유입해 신진인사들을 대거 배출했다. 특히 제주고씨와 광산김씨 집안에서 새 바람이 일어났다. 한말부터 향교의 수장과 아울러 상술에 뛰어나거나 조기에 교육을 받아 당시로서 최고의 학부를 다닌 분이 많았다. 이런 영향으로 이어 하귀리 송씨 집안과 장씨 집안에서도 산남山南 지방의 표선면과 남원면에서 개화 상권을 제일 먼저 개척했다.

김달준金達俊1905(광무9)~1954, 민족계몽운동가. 웅변가. 제주동아통항조합 창설준비위원. 본관은 광산이며 문간공 한란이-마루, 김영립金永立의 아들로 애월읍 하귀리<귀일>에서 태어났다.

서울 양정養正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물리학교에 진학, 중퇴, 한때 애월읍 신엄리<엄젱이> 소재의 사립 일신日新학교의 교사로 재임했다.

신간회 오사카지회는 제주 출신 김문준金文準, 송병구宋秉九, 조옹구趙夢九 등이 요직에 있으면서 활동했고 김달준, 김용해金容海 등이 간사로 맹활약했다.

19294월 제주-오사카 간 여객 항로를 개설하고 동포끼리 자주운항自主運航을 위한 제주동아통항조합通航組合준비회를 조직할 때 김달준, 문창래文昌來, 현석헌玄錫憲, 현길홍玄吉弘, 김동인金東仁, 성자선成子善 등 제주 민족주의자들이 이사진理事陣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우리는 우리 배로라는 표방 구호로 1930325제주 동아통항조합 뉴스창간호 300부를 발간해 배포했다.

1931111일 김달준과 문창래 등은 교룡환蛟龍丸을 취항시켰으며 이듬해 121일부터 복목환伏木丸으로 교체했다.

이때 극단적인 사회주의자들은 복목환伏木丸무산계급의 배로 규정하고 동아통합조합을 계급투쟁의 한 수단으로 활용하려 했다.

1933년에 조합간부 김달준, 현길홍, 강호경康鎬京 등은 통합조합을 운동단체로부터 떠나 경영단체로 전환시켜 부채의 정리와 운영의 합리화를 도모하고자 했다.

그러나 반제동맹反帝同盟 오사카지방위원회에 소속된 조합원들의 반대와 일제의 덤핑 정책으로 19341월에 조합은 해산됐다.

한편 1931410오사카지구 서기국명의로 제주도농민요구투쟁동맹에 관한 테제를 작성, 이 명제命題는 김달준의 작성설이 유력하다.

오사카에 거주하는 김달준이 항일 공산주의자 강창보姜昌輔와 제휴해 발표된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김대근金大根1947~. 한림읍 월림리<움부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기수도 시설이 전무했던 당시 그는 자취로 한림중학교제주상고를 거쳐 상경, 고학으로 숭실대학교 경영학과와 서울대학교 대학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제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 1984년에 모교인 숭실대학교의 부름을 받아 경영학부장, 학생처장, 경상대학장, 동 대학원장, 부총장 등을 맡으며 명성을 날렸다.

2008년 전체 교수회의, 총장후보추천위, 재단이사회 등 3단계의 투표에서 1위를 획득해 숭실대 총장에 취임, 특히 인도에 초등학교와 베트남에 IT센터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