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광주학생 항일 운동 때 광주고보 가두시위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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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명, 김만일 장남·보성군수
김대길, 산마감목관 대대로 세습
김대봉, 초대 제주감찰청장
김대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952년 5월 20일 개원한 초대 제주도의회가 제1차 의원 소집을 기념하는 모습이다. 당시 제주도의원으로 김대원, 강성건, 전인홍, 송방식, 허만필, 김영진, 김찬익, 현경만, 차명택, 김도준 등이 있었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1952년 5월 20일 개원한 초대 제주도의회가 제1차 의원 소집을 기념하는 모습이다. 당시 제주도의원으로 김대원, 강성건, 전인홍, 송방식, 허만필, 김영진, 김찬익, 현경만, 차명택, 김도준 등이 있었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김대명의 교지(敎旨).
김대명의 교지(敎旨).

김대명金大鳴1575(선조8)~1629(인조7), 무신. 전라도 보성군수寶城郡守, 본관은 경주이며 정의현(남원면 의귀리) 사람으로 헌마공신 김만일의 장남이다.

1592(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시민金時敏 장군의 휘하에서 크게 전공을 세웠으며 1595(선조28) 무과에 급제해 전라도 보성군수寶城郡守에 이르렀다. 부친 김만일이 1600년에 전마 200필을 헌납했다.

김대명은 1605(선조38) 무과에 급제하고, 1620(광해군12) 8월에 5백 필을 헌마를 하니 조정에서는 오위도총관五衛都總管이란 관직을 내리고 그에게는 수령을 제수해 그의 아들 김여金礪에게는 변장을 제수하도록 했다.

이로써 그는 보성군수 겸 순천진관順天鎭管 절제사를 역임했다.

김대길의 무과 교지.
김대길의 무과 교지.

김대길金大吉1608(선조41)~1668(현종9), 무신. 산마감목관. 자는 경보慶甫, 호는 장전長田.

본관은 경주이며 정의현(남원읍 의귀) 사람으로 헌마공신 김만일金萬鎰3남이며 김대명金大鳴의 아우이다.

감목관은 종6품의 무관직으로 김만일 이후 제주목사가 김만일金萬鎰 성손姓孫 중에서 인물을 선발해 임명한 뒤 조정에 보고하면 병조兵曹에서 직첩職帖을 내려 보냈다.

교지敎旨 글을 보면 강희康熙 3, 1664(헌종5) 511일에 김대길金大吉을 가선대부嘉善大夫 제주 산마山馬감목관으로 임명했다.

제주목사가 장계狀啓를 올리기를 4년 동안 번식시킨 말이 344필이라고 통보했기에 그것이 승인돼 차첩差帖(임명장)을 작성해 발급한 것이다.

1630(인조8) 무과에 급제, 그는 부친의 뜻을 이어 1658(효종 9)에 말 208필을 조정에 헌납하니 그 공로로 산마감목관을 내려 그 직무를 대대로 세습하게 됐다.

김대봉金大奉1904(광무8)~1950(납북), 미 군정기의 경무부警務部 공보실장, 제주도의 도승격에 따라 초대 제주감찰청장.

제주시 성내 태생으로 일제강점기에 제주실기濟州實記를 지은 신천信天 김두봉金斗奉의 아우이다.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1933년 교토京都의 동지사同志社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성내교회 부설 영흥永興학교에서 교편을, 일제시대 신문기자로 활약하더니 실업계로 전신轉身, 극동산업 공사장公司長으로 재임했다.

조국이 해방되어 194681일 제주도가 도로 승격됨에 따라 제9관구경찰청의 설치가 예상됐으나 제8관구管區에서 독립한 감찰부監察部가 설치됐다. 동년 827일 그 초대 청장廳長에 발령, 당시 이색적인 인사 조치라고 주목을 받았다.

경무부에서는 수사국장 최능진崔能鎭이 파면으로 김대봉 제주감찰청장을 경무부 관방官房 근무를 명하고 제주감찰청 부청장 신우균申宇均을 후임 청장으로 승진 발령했다.

그는 경찰공보실이 생긴 이래 항상 경찰관에게 겸허한 태도로 민중과 접하되 민주경찰 건설을 위해 경찰행정 역량을 가지도록 노력할 것을 부탁했다.

김대봉은 19488월 정부수립 후 내무부 비서실 총무과장으로 재직했으니 그는 당시까지 제주도 출신으로 가장 고위직에 있던 인사였다.

19506·25전쟁 발발 후 서울에서 인민군에 의해 납북拉北당하고 다만 부인과 아들은 제주로 피난오게 되었다.

김대원金大元1910(융희4)~1958(분단시대), 광주학생 항일운동 때 광주고보의 항일활동.

제주도의회 초대 의원. 본관은 김해. 제주대학교 교수 김수종의 선친.

당시 한림면장을 지낸 김창우金昶宇의 장남으로 한림리<-수풀>에서 태어났으나 원적은 산북 귀덕리<복덕->가 된다.

초대 도의원 중에 독립 유공자는 김대원과 강성건 두 의원뿐이다.

1929113일 광주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일본의 민족 차별 교육 정책과 또 일본인 학생이 한국 학생에 대한 멸시와 천대에 대한 분노의 폭발이었다.

김대원은 독립 운동 시위가 일어난 광주고보 학생의 가두시위를 주도하던 중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광주경찰서에 구속된 그는 시위 주동자라는 굴레가 씌워진 가운데 별도의 취조를 받았다.

19301018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항소해 19316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이 확정되었다.

당시 광주에서 항일 학생 운동에 가담해 유죄 판결을 받은 제주 출신으로 광주고보 학생김대원, 강윤석(康潤錫(화북), 김시황金時璜(조천)이 있었고 전 해에 퇴학당한 김시성金時成(조천), 광주농업의 학생으로는 홍원표洪元杓(귀덕), 광주사범의 강문범姜文範(상예), 이신형李信珩(조천) 등이 있다.

김대원은 19525월 제주도 도의회의원 선거 때에 자유당 소속으로 초대 도의원으로 당선됐다.

또 동 제9회 도의회에서 그는 입맥立麥 가격 조절에 관한 건을 상정 가결하고, 이어 본도 어항 축조 문제를 절충하기 위해 강성건姜成健 의원과 함께 중앙에 파견되기도 했다.

김대원은 1958719일 세상을 떠나 서울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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