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선조들이 지켜낸 마을 생명수, 여전히 솟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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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물, 항파두리에 위치…삼별초 김통정 장군 전설 얽혀
구시물, 여물통 닮아 붙여진 이름…옛 원형 잘 보전돼
항파두리 입구 인근에 있는 장수물에는 삼별초의 대장 김통정 장군에 관한 전설이 녹아 있다. 물이 솟아 흐르는 주변에는 바위들이 둘러져 있다.
항파두리 입구 인근에 있는 장수물에는 삼별초의 대장 김통정 장군에 관한 전설이 녹아 있다. 물이 솟아 흐르는 주변에는 바위들이 둘러져 있다.

제주지역에서는 빗물이 지하로 스며든 뒤 지층의 틈새를 통해 지표로 솟아나는 물을 용천수라고 부른다.

상수도가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에는 먹는 물이나 마을의 온갖 일에 사용되는 물은 용천수를 활용했다. 용천수에 얽힌 설화나 이야기도 많다.

김통정 장군 전설 담겨있는 장수물

장수물은 삼별초의 대장 김통정 장군에 관한 전설이 얽힌 유적지로 흔히 장수물또는 장수발자국으로 알려져 있다.

제주올레길 16코스에 포함돼 있다.

항파두리 입구 교차로 인근에는 장수물이라는 표지판이 있다.

돌계단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용천수인 장수물이 위치해 있다.

물이 솟아 흐르는 주변에는 바위들이 둘러져 있고 주변에는 소나무가 많이 있다. 현재는 음용수로 이용할 수 없다.

전설에 의하면 김통정 장군이 관군에 쫓겨 군사들이 허기와 목마름에 지쳐 있을 때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고 바위 위에 뛰어내리자 그 발자국에서 물이 솟아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장수물은 원래 횃부리 또는 횃부릿물이라고도 불려왔던 곳이다.

횃부리는 ()’의 다른 소리인 어떤 물건의 끝이 뾰족한 부분을 이르는 부리가 결합된 말로 추정된다.

주변에는 큰 바위들로 큰 바위들로 둘러져 있으며, 현무암 암반 중앙에 가로 40, 세로 60, 깊이 20정도의 신발 자국처럼 파였다.

유럽과 아시아 대륙 대부분을 정복한 몽골은 고려 고종 18(1231)부터 30여 년간 6회에 거쳐 고려를 침략했다.

이에 조정은 강화도를 임시 왕도로 정했지만결국 항복하고 개경으로 돌아갔다.

항전의 중심세력이었던 삼별초는 이에 불복해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배중손 장군 지휘 아래 대몽항전을 이어갔다.

하지만 진도에서 패전해 왕온과 배중손 등이 전사했다.

삼별초의 남은 병력은 김통정 장군의 지휘 아래 원종 12(1271) 제주로 입도했다.

삼별초군은 항파두리 토성을 쌓고 항전했지만 원종 14(1273) 12000여 명에 달하는 고려와 몽골 연합군의 총공격을 받아 대부분 전사했고 성은 함락됐다.

김통정 장군은 남은 병사와 함께 성을 탈출했지만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삼별초군의 항몽투쟁은 끝이났다.

김통정 장군은 민중들에게 외세에 저항하는 영웅이라는 인식이 있어, 그에 관한 여러 설화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제주시 애월읍 상귀리에 있는 구시물은 삼별초 항쟁 당시 식수로 이용됐다고 전해진다.
제주시 애월읍 상귀리에 있는 구시물은 삼별초 항쟁 당시 식수로 이용됐다고 전해진다.

주민 생명수 구시물

제주시 애월읍 상귀리에 있는 구시물은 구시(구유)와 물의 합성어이다.

구시물은 샘 모양이 여물통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나무와 돌로 만든 수로를 파서 만든 것이라는 뜻도 담겨있다.

구시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질 좋은 생수라서 콜레라가 돌 때도 이곳은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었다고 전해진다.

물맛이 좋아 상수도가 일반화된 현대까지도 식수로 이용되기도 했다.

현재 제주에서 남아 있는 산물 가운데 옛 원형이 잘 보전된 곳이다.

 

구시물로 들어가는 입구의 표지판을 따라가면 구시물을 마주할 수 있다.
구시물로 들어가는 입구의 표지판을 따라가면 구시물을 마주할 수 있다.

구시물은 삼별초의 식수원이었다. 김통정장군이토성을 구축할 때 외성으로 에워싸서 식수로 이용했다고 한다.

1880년께 에는 나무 구시(길게 판 홈통)를 시설해 이용했다. 1928년 가뭄이 심해 금덕(유수암)과 광령 등 인근마을에서도 이물을 음용수로 이용했으며, 용출량이 부족할 때는 마을 청년들이 밤을 새워가며 물을 지키고 배급했다.

나무로 470x265x70를 파서 만든 구시를 시설해 토성을 구축할 때 이용했다고 한다.

19922월에는 고려시대에 설치했던 것으로 보이는 나무 구시가 현재의 길 아래쪽 뻘 속에서 발견됐는 데 현재의 돌 구시와 모양이 거의 같았다.

상수도가 보급되기 이전에 용천수는 식수인 동시에 생활용수로서 주민들의 생명수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도로 개발과 상수도의 보급 등으로 점차 수량이 줄어들고 파괴돼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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