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우는 이들과 함께 울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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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옥, 서울과학종합대학원 초빙교수/논설위원

4월, 벚꽃이 화사한데도 아침저녁으론 뼛속이 쌀쌀하다. 봄이 자꾸만 뒷걸음치게 하는 이 바람은 어디서 오는 걸까? 4월의 섬 바람은 ‘수의 없이 죽은 사내들과 관에 묻히지 못한 아내들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은 아이의 울음에서 시작된다’는 이종형 시인은, 우리가 밟고 선 땅 아래가 죽은 자의 무덤이기 때문이라 한다. 봄맞이하러 온 당신은 몰랐겠으나 모가지가 뚝뚝 부러진 동백꽃처럼 돌담 아래에 붉은 피를 쏟으며 죽어간 4·3 영령들의 비명으로 섬 전체가 ‘바람의 집’이 된 탓이라고.

그렇다.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6년 6개월간 지속된 4·3의 세월 동안, 제주에서는 동백꽃 떨어지듯 죽어간 목숨만 2만5000∼3만 명에 이르렀다. 제주도민 10명 중에 1명이 죽임 당했으니, 그야말로 제주도는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였다. 조천면 북촌리를 무대로 ‘순이삼촌’을 쓴 현기영 선생은 말한다. ‘아, 떼죽음당한 마을이 어디 우리 마을뿐이던가. 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라. 필시 그의 가족 중에 누구 한 사람이, 아니면 적어도 사촌까지 중에 누구 한 사람이 그 북새통에 죽었다고 말하리라.’

그랬다. 내 어머니의 조카 재이는 24세에 남편을 잃었다. 1948년 11월 19일, 중문 신작로의 대수구우영에서 이웃 주민 17명과 총살을 당했다. 같이 희생된 마을사람들은 23∼31세의 청년들이었다. 남편을 가슴에 묻고 난 재이는, 사흘 만에 바다로 나갔다. 파도치는 겨울 물속으로 맨몸을 던졌다. 하늘이 그 심정을 헤아렸을까. 아들이 태어나, 잘 자라서 아버지가 되었다. 그 즈음에 재이는 바다에서 익사했다. 상군이 죽을 수 없는 얕은 수심이었다. 남겨진 망실이에는 빈 소주병이 덩그러니 울고 있었다. ‘술을 먹지 말앙, 마음을 크게 먹으라’는 고모에게, ‘답답해연 숨을 쉴 수가 어수다’며 가슴 치던 재이.

눈물조차 금지됐던 4·3이 올해로 71주년, 지방공휴일이 되었다. 희생자를 마음껏 추모하고 4·3 정신과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함이다. 기실로 이날을 위해 순이삼촌의 북촌리 사람들은 제삿날마다 모여앉아 그 끔찍한 사건-한동네 사람 약 350명이 한꺼번에 죽어간 학살의 참상을, 아이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했던 것이다. 김종두 시인의 제주여인 또한 ‘설룬 내 애기야, 호다 이 할망 살아 온 시상-눈물의 세월, 제주의 아픔을 멩심해영 들었당, 후제 느네 아이덜 크거들랑 잘 도시려(말해) 주라’고 신신당부 하였던 것.

아, 그런데 우리는, 한 반에 대 여섯 명이 아버지의 제사떡을 가져오던 날, 곤떡과 침떡을 아귀아귀 해치웠다. 그날에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동안 어머니는 어떻게 살았는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지난밤 삼춘들이 삼켰을 한숨 어린 곤밥과 피눈물 스민 나물을, 누구도 묻지 않고 게걸스레 먹었다. 몰라서 그랬다. 모르는 것이 죄임을, 누군가에겐 상처가 됨을, 그때는 정말 알지 못하였다.

이제는 우리로 하여금 우는 이들과 함께 울게 하라. 그날에 북촌국민학교 운동장에 벗겨져 널려진 임자 없는 고무신이 가마니로 하나는 실히 되었음을 온 세상이 알게 하라. 섣알오름으로 끌려가며 가는 길을 알리고자 눈물로 떨어뜨린 고무신을, 이제는 전 도민이 추념해야지 않겠는가.

원희룡 도정이 약속한 4·3의 승화와 전국화를 기도하며, 추모 사이렌이 울리는 시간, 4월 3일 10시에는 울지 못한 참회록을 쓰자. 4월의 섬 바람은 뼛속으로 스며드는 게 아니라 뼛속에서 시작된다니, 이 한기가 봄기운에 녹아들기까지 뜨거운 눈물을 삼키며 울자. 동백꽃 가슴에 달고, 검정 고무신 고쳐 신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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