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 그리고 최정숙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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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운 BHA 국제학교 이사, 시인·수필가

선생님, 차 한잔 드시겠어요?”

감사합니다. 무슨 차인가요?”

목련차입니다. 집에서 직접 덕어 우려냈습니다. 집에 핀 봉오리를 따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활짝 핀 꽃은 못 보게 되었네요.” 마음씨 고운 임선생님이 차를 따른다. 옅은 초록이 베인 차를 한 모금 마시자, 짙고 그윽한 허브향이 가슴 속까지 퍼진다.

흐드러지게 핀 목련을 보면 언제나 목련의 상큼한 향과 더불어 그리운 사람이 떠오른다. 어느 해 봄 최정숙 선생님이 부르셨다.

요한아, 바쁘지 않으면 나무를 좀 심을까?”

, 무슨 나무예요?”

목련이라고 하는 귀한 꽃나무인데, 서울 친구가 한 그루 보내왔구나. 네 방 앞 화단 양지 바른 곳에 심도록 하자.”

나는 그 날 선생님과 함께 목련을 정성껏 심었다. 그리고 유별히 살피며 거름도 하고, 물도 주었다. 자라서 어떤 꽃이 필는지 몹시 궁금했다. 50여 년 전의 일이다. 지금은 흔하지만 그 당시 제주에서 목련이라는 꽃나무는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었다. 아마 산목련은 있었을 것이다. 선생님과 함께 목련을 심었으나, 그 나무가 피운 꽃을 본 기억은 없다. 목련은 속성상 이른 봄, 봄의 전령사인 듯, 한 일주일 피었다가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한꺼번에 뚝뚝 모두 져 버린다. 목련이 피는 시기에 내가 그 집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최정숙 선생님 댁에서 함께 지냈다. 나의 어려운 가정 사정을 잘 알고 계신 선생님께서 거두어 돌봐주신 것이다. 한 집에 살면서도 그 분의 흐트러진 모습을 한 번도 뵌 적이 없다. 항상 회색 빛 단정한 치마저고리에 정돈된 쪽 머리, 그리고 잔잔한 미소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최정숙 선생님은 유관순 선생님과 함께 100년 전 독립만세 운동을 하시며 옥고를 치르신 분이다. 그 분의 자취는 너무도 커서 다 헤아릴 수 없으나, 자신을 결코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신 분이다. 제주 최초의 여의사, 야간강습소 여수원 운영, 신성학원 무보수 교장,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감, 로마교황훈장 서훈자, 5.15 민족상 수상자,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 등이다.

선생님은 평생 동정으로 사셨다. 어려서부터 그 분은 성직자가 되기를 열망하셨던 것 같다. 성직의 문을 두들겼으나, 3·1 독립운동으로 투옥되었던 일이 걸림돌이 되어 수녀로 가는 길을 막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세속에 살면서도 성직자의 삶을 살아가는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으로 평생을 사셨다. 돌아가셔서야 프란치스코 수도복을 입고 묻히셨다. 나는 군 복무 중에 방송을 통해 선생님의 부음을 접했다.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제대 후에 그분의 묘소를 찾아 기도드리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복스런 목련 봉오리를 보려나했더니 벌써 우아한 꽃잎을 펼치고, 오늘은 뚝뚝 떨어지고 있다. 목련같이 아름답고, 목련같이 향기롭고, 목련같이 강인하고, 목련같이 순결한 최정숙 선생님! 선생님의 자취를 따라 살고, 배우고, 전하며 살겠다고 오늘 다시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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