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화해 시대의 제주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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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수, 리쓰메이칸대학 국제관계학부 특임교수/논설위원

촛불 혁명은 제주4·3의 문제해결에도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았다. 지난해 4·3 70주년에는 ‘4·3의 전국화’를 위한 여러 행사가 추진되면서 4·3에 대한 한국 사회에서의 인지도도 79% (작년 대비 10% 상승)까지 올랐다고 한다(한국갤럽).

제주4·3의 문제해결은 한국 사회가 얼마나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인가를 헤아리는 시금석이기도 하고, 그러한 인식이 전국적으로 퍼진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4·3운동이 끈질기게 이어지고, 급기야 대통령이 4·3 희생자 유족과 제주 도민들에게 ‘4·3의 완전해결’을 언급할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사건발발로부터 7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4·3의 완전해결’까지는 너무 많은 과제가 남아 있다.

지난해 4·3 70주년 추도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4·3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배·보상과 국가 트라우마센터의 건설’을 언급했고, 국회에 상정된 4·3 특별법 개정안에도 같은 내용들이 담겨 있다.

그밖에 4·3당시의 군사재판 무효화나 특별재심 등 희생자·유족의 구체적인 피해회복이 거론되고 있지만, 현재 제주도민의 최대의 관심사는 배·보상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과거사 정리에는 해당 사건 희생자의 배·보상이 따르기 마련이고 지금의 한국 국회의 파행 상태로 보아 배·보상을 실현만 해도 상당한 시간과 인내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배·보상의 실현을 가지고서 ‘4·3의 완전해결’로 볼 수는 없다.

배·보상의 화두에 밀려서 두드러지지 않는 4·3의 핵심문제들도 적지 않다. 그중의 하나가 희생자 선별에 관한 문제다.

2001년 헌법재판소는 4·3의 무장봉기를 주도한 남로당 핵심간부나 ‘공산무장 병력지휘관’에 대해서는 4·3특별법이 정하는 ‘희생자의 범위’에서 배제된다는 판단을 내렸고 국무총리 밑에 설치된 ‘4·3위원회’도 이 헌법판단을 따르고 있다.

이로 인해 배제된 희생자는 극히 소수(10~20명 추정)에 불과하지만 이러한 희생자선별의 논리 자체는 4·3운동이 지향해 온 화해와 상생의 논리에 비춰 재고해야 할 일이지 않을까 싶다.

무장대까지 포함한 모든 희생자를 공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도민 정서에 어긋날 뿐더러 도민 사회에 공연히 갈등만 빚을 일이라는 비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장대를 희생자로서 인정한다는 것이 반드시 4·3당시의 무장대의 주장이나 궐기를 정의로운 ‘항쟁’으로서 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무장대의 희생자로서의 인정 문제와 소위 ‘정명’이나 4·3의 역사 정립과 같은 이념 문제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4·3사건 진압과정에서 사망한 군인과 경찰에 관해서 2006년 법제처는 ‘군·경도 해방 전후 혼란한 이데올로기의 대립과정에서 발생한 희생자의 범위에 포함된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제주일보’ 2006. 6. 20.). 즉 당시의 이데올로기적 대치 상황을 ‘혼란’으로 보고 옳고 그르고를 떠나 ‘희생자’로 여겨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논리는 무장대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해방정국의 과도기적 혼란 속에서 분출한 이데올로기나 정의의 관념을 지금의 분단 상황을 기준 삼아 재단하고 심판하는 것은 남북화해를 내다보는 시대정신과도 어긋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4·3의 무장봉기를 ‘반역’으로 보는 시각이 희생자 선정의 공적인 논리나 기준으로 이어지는 한, 4·3의 문제 해결도 ‘미완’의 상태로 머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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