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과 빨갱이 사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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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업, 전략사업본부장 겸 논설위원

“4·3 당시 미국과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의 8할을 붉은색으로 칠하고, ‘붉은 섬’(Red island)이라고 명명했다. 그 시기 붉은색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수많은 양민들이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고 죽어갔다. 그 대량학살을 ‘레드 헌트’(Red hunt·빨갱이 사냥)라고 불렀다.”

제주4·3 해결에 평생을 바친 현기영(78) 선생의 얘기다. 그는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인 1978년, 북촌리 대학살을 다룬 소설 ‘순이삼촌’을 발표해 처음으로 4·3을 세상에 알렸다. 이러한 공로 등으로 현 선생은 지난 1일 제3회 제주4·3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랬다.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해 1948년 4월 3일 소요 사태로 촉발된 4·3은 1954년 9월 21일까지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약 3만 명의 도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상당수가 무고한 양민들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빨갱이’로 덧칠돼 참혹하게 학살됐다.

실로 원통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이후 한동안 4·3은 빨갱이가 저지른 폭동이라는 독재 정부의 호도로 금기어가 됐다. 빨갱이로 낙인돼 희생되거나 온갖 불이익을 당할 수 있어서다. 그런 점에서 ‘빨갱이’란 단어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였다.

▲원래 빨갱이는 ‘공산주의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사전적 정의다. 하지만 냉전 및 독재시대엔 정치적 반대자 및 민주화 세력을 탄압하는 도구로 악용됐다. 지금 역시도 정치적 경쟁 세력을 매도하는 ‘증오와 배척의 언어’로 쓰이고 있는 실정이다.

그 어원 해석도 분분하다. 그중 유격대원을 뜻하는 ‘파르티잔(Partisan)이 빨치산으로 변형됐다가 최종적으로 빨갱이가 됐다는 설이 적잖다.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의 깃발이 빨간 데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

▲국방경비법 위반 및 내란죄 혐의로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4·3 생존 수형인’ 18명이 지난 1월 빨갱이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불법 군사재판 재심 선고공판에서 공소기각으로 무죄를 인정받은 게다. 허나 갈 길이 멀다. 나머지 2500여 명에 대한 법적 명예회복이 시급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4·3 당시 군사재판의 일괄 무효를 담은 4·3특별법 개정안이 조속히 처리돼야 한다. 한데 난항이다. 오늘로 4·3 71주년을 맞았다. 통곡의 세월이다. 4·3 영령들의 넋을 달래고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국회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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