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검은 헝겊 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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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순희 수필가

어제는 4·3 추념일이었다. 제주 사람이면 누구나 마음에 검은 헝겊을 달았을 것이다.

왜 애써 모른 척하게 해 왔을까.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누가 속 시원히 말해 주는 이도 없을뿐더러 어른들의 대화에는 더욱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왜 죽었어요?”라고 하면, “어린 것이 알아서 뭐 하려고, 쩟.” 하며 혀를 차곤 했다.

우리 마을은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궤네기 당에서 돗제를 지냈다고 한다. 마을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며 돼지를 잡아 제를 지냈다. 4·3사건이 발발하면서 각자의 집에서 지내게 된 사실을 나이 오십 세가 넘어서 재작년에야 알게 되었다.

얼마 전에 친척 언니에게서 전해 들은 것도 처음 듣는 얘기였다. 돌아가신 지 몇 십 년 되신 외할아버지께서 마을 이장이던 시절, 북촌에 와서 시신을 수습해 가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마을 청년 몇 명을 데리고 가 일을 마친 뒤 할아버지는 크게 앓으셨다고 했다. 이런 얘기들이 왜 함부로 파헤쳐선 안 되는 일이며 금지된 대화 목록인 것인가. 그런데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는 것 또한 죄송스러운 일이다. 나만 그러한가.

제주에서 나고 자라도 잘 모른다. 학교에서 배운 것도 없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행방불명되었는데도 분명한 족적을 지니지 못하고 어떻게 떠도는 역사가 되었는가. 4·3 사건 얘기를 물어볼라치면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입 쫌쫌, 눈 뽈롱.”이라는 말을 했다. 이 한마디에 모든 것을 숨기기엔 태부족이다. 어쩌면 강요된 침묵 속에 입은 닫히고 눈은 감겼다고 해야 할까. 나만 그러했나.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대표작인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도 알 수 있지만, 특별히 여자였기 때문에 말 못할 고초를 겪은 이들도 많았다. 남의 대화를 들은 게 다였지만 성적 유린을 당한 여성들의 고통은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특별히 임산부에게 자행되었던 이야기는 같은 여자로서 몸서리 쳐지는 일이었다. 인간의 생명이 파리 목숨보다 못한 시절이었다고 했다.

내가 들은 건 밭에서 유채를 수확하는 날 놉들의 대화였다. 밭일 할 때 그런 말들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밭이 요만큼 옴팡졌던가 봐. ‘삼촌’ 하고 부르기에 위를 봤더니 총부리 앞에 끌려가는 이웃집 총각이 ‘우리 집에 나 끌려갔댄 전해줍서.’ 아, 이 한마디에 우리 아버지도 밭 갈던 쇠도 놔 둔 채 끌려간 거라.”

“왜요?”

“암호를 주고받았다는 거지.”

“어휴.”

“면회도 안 시켜 주고 우리 집이 난리가 났지. 나중에야 면회가 되어 어머니하고 갔는데 우리 아버지라고 할 수가 없어. 얼마나 취조를 당했는지….”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그것이 마지막이야. 먼 바다에 수장됐다는 말만 떠돌았어. 언제 돌아가신 줄도 모르니까 제사도 생신날에 지내.”

그런 일들이 이곳 제주도, 선량한 사람들이 사는 이 땅에서 발생했다는 게 믿을 수 없다. 나이 구십 다된 어느 할머니는 한라산에서 총알이 퍼부어지는 가운데 토끼몰이를 당했다. 무작정 앞을 보고 뛰기만 했단다. 상세히 듣고 싶어도 나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인자한 분이지만 시름 가득한 얼굴에 고통의 흔적을 캐어 내서 무엇하랴.

아, 4·3의 영혼들이시여, 평안히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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