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회복과 배보상 해결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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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평화공원서 어제 제71주년 추념식…눈물바다
김순여·영일·영준씨 남매
훙춘호씨, 김정자·정숙 자매
4·3으로 겪은 고초 얘기하다
김순여·영일·영준씨 남매가 아버지의 위패를 보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사진 위), 김정자·정숙 자매가 부모의 비석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김순여·영일·영준씨 남매가 아버지의 위패를 보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사진 위), 김정자·정숙 자매가 부모의 비석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한 평생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살아 왔지만 이제야 벗게 됐다. 앞으로 명예회복과 함께 배·보상 문제도 빠른 시일 내로 해결되길 바란다.”

3일 제71주년 4·3희생자 추념식이 거행된 제주4·3평화공원에서는 4·3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많은 도민과 유족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날 위패봉안실을 찾은 김순여씨(81·삼양2), 영일씨(77·서울 영등포구), 영준씨(75·삼양1) 남매는 지난달 26일 제주4·3희생자로 추가 인정받은 126명 가운데 한 명인 아버지 위패를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들 남매는 아버지가 해방 후 제주로 돌아온 뒤 4·3으로 많은 고초를 겪었다고 토로했다.

4·3 당시 다른 동네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경찰이 수시로 남매의 아버지를 연행해 조사를 벌였다.

경찰에 연행된 뒤 혐의가 없어 풀려나는 일이 반복되던 어느 날 아버지는 갑자기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이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이라는 아버지의 연락을 받은 뒤 이들 남매는 지옥과 다름없는 삶을 살아야 했다.

김영일씨는 혐의가 없어 풀려나는 일이 반복된 만큼 죄가 없었지만 아버지는 억울한 옥살이를 이어가다 결국 광주형무소에서 숨을 거뒀다빨갱이로 낙인 찍혀 한 평생을 살다보니 ‘4·3’만 들으면 치가 떨릴 정도로 싫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가족의 설득으로 지난해 희생자와 유족으로 추가 신고를 했고 올해 이를 인정받아 억울함을 달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날 동생들의 억울한 죽음을 가슴 속에 담아왔던 홍춘호씨(81·안덕면 동광리)는 희생자로 추가 인정받은 두 동생들의 위패 앞에서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4·3 당시 홍씨의 가족은 마을에 들이닥친 토벌대를 피해 산으로 숨어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지만, 어린 세 동생들은 굶주림을 이겨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동생들의 연이은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홍씨는 둘째 동생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고, 둘째 동생의 위패는 아버지 이름 아래 2남으로 올릴 수밖에 없던 상황을 더욱 안타까워했다.

홍씨는 희생자로 인정받기 어려울 것 같아 셋째 동생을 추가 희생자로 신청하지 않았지만 조만간 셋째 동생을 추가 희생자로 신고하기로 했다.

홍씨는 돌아가신 부모님이 생전에 죽은 세 아들 입에 좁쌀물도 못 넣어줬다며 억울해 하셨다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이라도 동생들이 4·3희생자로 인정받아 마음이 놓인다고 말했다.

4·3 당시 희생된 부모와 할아버지, 삼촌 등의 비석 앞에서 제사를 올린 김정자(77·용담2), 김정숙(73·연동) 자매는 홀로 남은 할머니 손에 자랐다.

김정자씨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희생되자 할머니는 일본에 있던 삼촌의 자식으로 출생신고를 해 어머니, 아버지의 유족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매년 열리는 행사에 유족으로 참석하지 못한 채 비석을 닦고 제사만 올릴 수밖에 없는 등 안타까운 상황에 놓인 유족들도 도움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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