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복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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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곤 수필가

저기 꽃이 피었네. 차를 멈춘 후 카메라를 들고 내렸다. 하얗게 서리가 내린 길가에는 희고 투명한 작은 꽃 몇 송이가 피어 있었다. 마치 얼음을 정교하게 깎은 후 다듬어 놓은 모양이다. 크기는 손톱보다 더 작았다. 만지면 바스러질 듯, 입김이라도 쐬면 녹을 것 같았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꽃들이 모두 얼음으로 변한 걸까.

카메라를 들고 땅에 엎드렸다. 뷰파인더에 눈을 대고 초점을 맞춘 후 손가락을 셔터 위에 올렸다. 약간 힘을 주면 반셔터 상태가 되고, 다시 한 번 더 누르면 찰칵 소리가 나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러 번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도 딱딱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셔터가 눌러지지 않았다. 너무 추우면 카메라가 작동하지 않는다던데. 아니면 혹시 배터리가 방전되어버렸을까. 손이 시려왔지만 어떻게든지 사진을 찍어야겠다면서 계속 손가락에 힘을 주었지만 어쩌다가 한 컷이 찍힌 후에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다.

눈앞에 다시 볼 수 없는 귀한 얼음꽃이 있는데 일어서야 하다니. 아쉬움 가득 안고 잠을 깨고 말았다. 너무 생생하여 잠시 멍해졌다. 몸은 따뜻한 이불 속에 있었지만 잠들지 않은 영혼은 이미 꽃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던가 보다.

설중화(雪中花)를 담으러 가기로 약속된 날이다. 며칠 전 많은 눈이 내렸다. 눈이 적당히 녹았을 때 달려가면 겨울에 피는 꽃들을 만날 수도 있다. 혹시 연락이 올까 이른 아침부터 설레고 있을 때 야생화 동호회 카페의 회장님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설중화를 담으러 가실 분은 늦지 않게 주차장으로 오십시오. 이번에 찾아볼 꽃과 열매들은 흰괭이눈, 세복수초, 새끼노루귀, 자금우, 붉은겨울살이 등입니다. 준비물은 접사렌즈와 망원렌즈입니다.”

하나같이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이름들이다. 벌써 그 아이들이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몸을 떠난 혼은 벌써 계곡을 찾아 엎드리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시간을 낼 수 없는 수요일이었다. 꼭 법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었지만 스스로에게 정한 원칙에 충실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한 번 기회를 놓치면 일 년을 기다려야 한다. 벌써 몇 년을 이렇게 흘려보내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달려가야지. 마음에 단단히 다짐을 했다.

일 년을 기다려도 눈을 녹이며 피는 순수의 영혼들을 만날 수 있는 날은 많지 않다. 적당히 많은 눈이 내린 후 포근한 날씨가 며칠 계속되어야 한다. 눈이 녹으면서 때를 맞추어 꽃들이 피어야 하고, 하늘은 맑아야 한다. 혹시라도 날씨가 흐리거나 눈보라가 몰려오기라도 하면 그동안의 기다림이 아무 소용이 없다. 계곡에 내려오는 한겨울의 햇살은 짧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다. 하늘은 일 년에 단 며칠, 몇 번의 기회, 심지어는 겨우 몇 시간을 허락할 때도 있다. 우리는 잽싸게 달려가 겸손함과 경건함의 자세로 차가운 대지 위에 엎드려 머리를 숙여야 한다.

오래간만에 만난 얼굴들이 모두 싱글거리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지난 가을 이후 첫 만남이다. 손을 맞잡고 새해 인사 겸 올해도 꽃복을 받으세요.” “꽃복을 많이 많이 받으십시오.”라는 덕담을 나누기에 바빴다. 세상에는 많은 복이 있지만 꽃복만큼 귀한 것이 있을까. 한때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지만 감히 꽃복에 비할 바가 아니다.

오늘 하루를 돌아본다. 기다림이 쌓여 설렘이 되고, 설렘이 쌓여 정성이 되고, 정성이 쌓여 한 점의 작품이 된다. 비록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명작일 수는 없겠지만, 아무려면 어때. 올해도 설국에서 피어나는 그 어린 영혼들, 순수의 뜨거움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으니.

잠시 눈을 감는다. 오늘 만난 꽃들이, 그리운 얼굴들이 어른거린다. 올해도 꽃들의 세상이 펼쳐지고, 모든 사람들에게 꽃복이 충만하게 임하기를 기도하며 조용히 하루를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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