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와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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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근형, 제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논설위원

오는 4월 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100년 전 우국지사들은 3·1운동 이후 일제에 대한 전국민적 저항을 조직화하고자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선포하였다. 임시정부 헌법은 국민주권주의를 표방하고 있어, 이전의 의병 조직들이 주창해왔던 조선을 회복하자는 ‘복벽주의’는 사라지게 되었다. 임시정부가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민주공화제를 채택했다는 것은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독립국가는 바로 민주주의국가가 돼야 함을 의미한다.

온 겨레의 소망을 받고 탄생한 임시정부는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는다. 임시정부는 한민족을 대표하는 독립단체로서 출발은 했으나, 독립지사들 간의 알력과 이념 갈등을 극복하지 못했다. 우리의 독립운동은 임정 중심으로만 전개된 것이 아니다. 이념에 따라 좌·우로 나뉘어 여려 갈래의 단체들이 개별적으로 행동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된 이승만 박사는 상해에서의 갈등을 겪고 미국으로 돌아간 후 임정 구미대표부의 위원장 자격으로 미국 내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1940년대 초 이승만은 미국 국무장관을 면담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장관을 만나지는 못하고 그의 보좌관 엘저 히스와의 면담이 이루어졌다. 이승만은 히스에게 미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여 군사원조를 해줄 것을 역설하였다. 미국이 임정을 승인하지 않을 경우 스탈린이 한반도를 선점하여 공산화할 수 있으며, 한반도가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간 내전에 휩싸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했다. 해방도 되기 수년 전에 이런 예측을 하고 있는 이승만의 선견지명은 놀랍다. 히스는 나중에 소련의 첩자라고 밝혀진 인물이다. 그가 이승만의 요청을 거절했음은 물론,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루즈벨트의 보좌관으로서 소련에게 막대한 이권을 주는 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이승만 박사는 1941년 6월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를 출간하여 일본이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는 점을 이 책에서 지적하였다. 그해 12월 초 일제는 진주만을 공격하지 않았는가? 이승만의 예측은 적중하였다.

중국 국민당 장개석 총통도 1942년 4월 재정부장 송자문을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한 바 있다. 당시 미 국무성은 임정이 조선 본토에 있는 조선인들과의 관계에서 대표성이 없다는 점과 독립단체들이 많은데 임정 하나만을 대표성을 가진 정부라고 승인하기 어렵다는 점을 들어 승인을 거부했다. 우리의 독립단체들이 분열돼 있었다는 점에서 미국만을 탓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1945년 초 김구주석은 미국 전략정보국(OSS)의 지원을 받아 소수의 한반도 침투부대를 양성했다. 여기에 참여한 요원 중 대표적인 인물이 장준하, 김준엽 선생 등이다. 하지만 일본이 생각보다 일찍 항복하는 바람에 광복군이 한반도에 침투할 기회는 상실하고 말았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이점을 한탄하고 있기도 하다. 해방 이후 독립 국가를 세우는 데 있어 우리의 주장이 반영될 여지가 줄어들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여 군사지원도 하고 임정의 정통성을 인정했더라면, 해방 후 3년 동안의 해방공간의 혼란도 상당부분 해소되지 않았을까? 더 나아가 독립국가를 세우는 데도 주도적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점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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