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식품가공·양묘업에 도전…제주 정치·경제사에 족적 남겨
(81)식품가공·양묘업에 도전…제주 정치·경제사에 족적 남겨
  • 고동수 기자
  • 승인 2019.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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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원, 사헌부장령 등 역임
김덕주, 美 MIT 유학…물리학자로 활약
김도영, 4·3 제9연대 대대장
김도전, 이도종 목사 부인·제광교회 권사
김도원, 금성교회 유치원 창시
김도준, 제주 민주공화당 창립 주도해
1960년대 중반 제주에는 유창산업과 해태농수산, 선일포도당 등 비교적 큰 규모의 공장이 설립돼 제주경제의 주역이 됐다. 제주도의회 의장 김도준은 식품가공업체인 유창산업과 유창농장 및 양묘업 발전에 심혈을 쏟았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1960년대 중반 제주에는 유창산업과 해태농수산, 선일포도당 등 비교적 큰 규모의 공장이 설립돼 제주경제의 주역이 됐다. 제주도의회 의장 김도준은 식품가공업체인 유창산업과 유창농장 및 양묘업 발전에 심혈을 쏟았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김덕원金德遠1634(인조12)~1704(숙종30), 문신.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제주에 유배된 남인의 수령. 본관은 원주. 자는 자장子長. 호는 휴곡休谷. 아버지는 판관 인문仁文이다.

1662(현종3)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무원부정자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현종 연간에는 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을 역임하면서 언관으로 활약했다. 1675(숙종 1)에 홍문록에 오르고, 사헌부장령에 임명됐다.

현종실록개수의 주장에 앞장섰고, 병조참판·형조참판으로서의 뛰어난 재주와 원만한 성품을 숙종에게 인정받아, 서인 정권이 들어서고 모든 남인이 제거될 때에도 관직을 유지했다.

이 시기에 한성판윤·경기감사·예조판서 등을 거쳤고, 1687년에는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연경에 다녀오기도 했다.

기사환국으로 정권이 바뀌자 곧 우의정에 임명돼 이후의 정국을 주도했다.

김덕주金德洲1934(일제강점기)~1997, 재일교포 학자. 교수. 구좌읍 송당리<손당> 출신, 본관은 광산, 세계적인 물리학자.

김덕주의 본관은 광산光山. 원적은 북제주군 구좌읍 -송당인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아버지 김완봉金完奉과 어머니 고청송高淸松의 장남으로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1941년 오사카 시립市立 동도곡東桃谷국민학교에 입학했다.

1944년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일본의 패색이 짙어 고향 송당리로 돌아와 김녕金寧국민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이듬해 조국은 해방이 되고 1946년 국민학교 5학년 때에 월반하여 오현五賢중학교에 입학, 4·3 사건으로 밀항선을 타서 일본으로 건너가 이듬해 가네미츠<金光常道>라는 일본 이름으로 오사카 부립북야고교府立北野高校에 들어가 19523월 졸업했다.

19563월 동경대학 이학부理學部 수학과를 졸업하고 학사 편입 후 1958년 동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순수과학이란 학구의 길로 나아가게 되어 1959년 일본물리학회 회원이 되었다.

1963년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이듬해 김갑순金甲順과 결혼했다.

그 후 일본학술진흥회 연구원, 또 동경대학 이학부 외국인 강사를 거쳐 1965년부터 1971년까지 미국의 MIT에 유학 갔다.

1965년 도미渡美 매사추세츠공대工大 부속 국립자기磁器연구소 소원으로, 1971년 일본 청산학원대학 이공학부 교수이면서 미국물리학회 회원으로 가입했다.

그후 런던·파리·베를린 등지의 연구 생활이나 국제회의 연구발표 등에서 발군의 실력을 과시했다.

1987년 일본 청산학원 학술포상을 수상, 논문 금속의 자성磁性과 전자격자電子格子 상호작용을 발표했다.

김도영金道榮육군대령, 제주4·3사건 당시 제9연대 대대장, 1연대장, 대구 출신.

그는 지원병으로 일본군에서 복무하고 1945년 조국이 해방되자 19465월 조선경비사관학교 1기생으로 입학, 45일 동안의 전과정全課程을 마쳐 동년 615일에 40명과 함께 임관됐다.

김도영은 19471222일 제주 제9연대 대대장(대위)으로서 대구의 제6연대로 전속되었다.

6·25전쟁 중 김도영은 부산의 제2훈련소 부소장을 지내고 휴전 직후인 1954년에는 논산 제1훈련소장을 지냈다.

김도전金道傳()이도종李道宗 목사의 부인. 기독교 권사. 장남 창구, 차남 영복, 삼남 원복, 사남 태복, 장녀 복순 등을 낳았다.

김 권사는 말년에 제주시로 옮겨 제광濟光교회의 권사를 지냈다.

김도원金道元1890~1941(일제강점기), 금성교회 유치원 창시자, 광산김씨 35세손 문공文簡공 세걸世傑공파, 애월읍 금성리<모실-> 김성천金聲天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제주의 초기 기독교 신자, 순국 장교 김동희金東禧의 부친, 금성교회의 초기 신자로서 이덕력李德連을 설득, 1920년 도내 최초의 유치원을 개설, 신식교육을 도입하는 데 앞장섰다.

자신의 딸 김혜아金惠兒(애월교 1927년 졸)와 같은 마을의 좌수석左銖石, 좌수인左銖仁(), 좌춘아左春兒(의사 고택수 박사의 어머니) 등도 함께 1920년에 유치원에 입학했다.

김도준金道準1913(일제강점기)~1974, 분단시대의 사업가, 제주도의회 의장.

김도준의 본관은 김해이며 구좌읍 하도리<별방> 면수동에서 태어나 1932년 제주도濟州島 산업계 임시 고원雇員으로 공직을 출발하면서 생활근거지를 세화리로 옮겼다.

그 뒤 표선면·구좌면사무소의 서기로 재임하고 1940년에 공직을 그만두어 사업에 착수, 양묘업養苗業으로 대성했다.

광복 후 정치에 관심을 보여 자유당 제주도당 부위원장을 역임, 19525월 제주도의회 초대 의원으로 당선되고 1956년 제2대 도의원으로 재선돼 동년 9월 부의장으로 피선, 19594월에 의장으로 피선됐다.

김도준은 식품가공업체 유창산업柳昌産業과 감귤원 유창농장 및 양묘업養苗業 발전에 심혈을 쏟았다.

19604·19혁명 이후 3·15 부정선거 관여로 말미암아 학생들로부터 의회 해산이란 압력을 받았다.

그러나 해산이 되면 도정이 마비돼 문제가 생길 것으로 보아, 의장단이 사표를 수리하는 선에서 매듭짓고 새로운 의장에 강영술姜榮述의원을 선출했다.

이듬해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19632월 민정이양에 따른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주도하는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이 창당될 때 제주도당의 창립멤버로 활동했다.

19641218일 민주공화당 제주도지부 연차대회에서 위원장에 선출됐다.

필자의 변 : 195718일 나의 결혼식이었다. 당시 애월상고(교장 장응선張應善) 대강당에서 식이 올려졌다. 그 날은 애월 5일 장날이라 하객도 많았다. 신랑 집에서 피로연이 열리는데 옆 채전 밭에 천막을 쳐 온 동네의 밥상을 빌려와 손님 각자마다 상을 차려 대접한다. 집 안거리에는 신부를 모커리, 밖거리에는 주요 손님을 받았다. 모커리에는 마침 도의회 부의장 김도준金道準(구좌 하도)이 의장 전인홍 주례와 동석해줘 고마웠다. 2년 후에 그때 주례는 도지사로, 김도준은 도의회 의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