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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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숙녀 수필가

온 사위가 고요하다. 딱히 할 일이 없는 터라 여유를 부리다 자잘한 선물들을 모아둔 장식장 앞으로 갔다. 따스한 봄볕과 안온한 기운이 깊숙이 스며드는 오후다.

금빛 발레복에 슈즈를 신은 작은 여자아이가 발레 동작을 하고 있는 흰색 자기 인형, 고급스러운 청색 디자인이 장식용으로 제격인 조그만 찻잔이 앞자리에 놓여있다. 지금은 장성한 조카들이 어릴 때 수학여행을 다녀오면서 사온 선물들이다. 옆에 있는 오르골, 태엽을 감으니 음악이 나오면서 한 쌍의 인형이 뱅그르르 춤을 춘다. 오래 전에 담임했던 아이가 보이스카우트 캠프를 갔다 오면서 사온 선물이다. 사근사근하던 중학생 적 아이가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선물을 고르느라 고개를 갸웃하며 딴은 고심했을 아이들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안쪽에 있는 작은 구리종을 꺼내본다. 크기에 비해 묵직하고 흔들면 명징한 소리가 나는 종이다. 여동생이 신혼여행 때 사다 준 아주 오래된 선물로 이걸 보고 있자면 이른 봄 매화꽃이 필 때 먼 곳으로 떠난 단아하던 동생이 떠올라 아려오는 마음을 어쩌지 못한다.

아직도 온기가 전해지는 듯한 손 편지 등 장식장엔 이것저것 꽤 있다. 하나씩 먼지를 닦으며 정리하노라니 문득 기억에만 있는 선물 하나도 떠오른다.

재수를 한답시고 서울에서 애면글면할 때 아버지가 보내주신 크리스마스카드다. 한 소녀가 불빛이 반짝이는 트리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그림 카드엔 과묵하시던 아버지의 염원이 오롯이 담겨있었다.

정리를 마치고 둘러보니 곳곳이 다 선물이다.

장미 두 송이가 눈에 들어온다. 남편이 생일선물로 꽃을 사러갔다가 늦은 시간이라 사지 못하자 케이크를 사면서 가게에 장식하고 있던 꽃을 얻어 들고 왔었다. 조화라서 당시는 그리 마음이 가지 않았으나 포장지만 바꿔주면 새 꽃이 되니 내게는 시간을 거꾸로 돌려주는 귀한 꽃이다.

거실 한 편을 피아노가 차지한다. 갈색 윤기가 흐르고 클래식한 분위기를 주는 이 피아노는 결혼할 때 부모님이 주신 유일한 선물이다. 초임 때부터 아끼며 저축하여 피아노를 샀었는데 친정에 그대로 놔둔다고 하자 대신 사주신 거다. 마음이 궁할 때 나를 위로하는 애장품 첫 순위다.

벽에 걸어놓은 큼직한 액자 하나를 바라본다. 새까만 피부에 온통 땋은 머리를 하고 목걸이를 겹겹이 두른 눈망울이 총총한 어린이 그림이다. 천연섬유에 천연물감만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은퇴 후에 제주도에 와서 살던 어느 분이 십년 만에 다시 서울로 돌아가면서 대신 소장해 달라면서 주고 가신 선물이다. 장관으로 재직할 당시 아프리카에 다녀오면서 가져온 기념품이라고 들었다. 우연한 인연으로 오가며 지낸 몇 해다. 나랏일뿐 아니라 세계적인 큰일까지 하신 분이지만 늘 겸손하고 인품이 고아하셨다. 자신의 직함을 내세워 이름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전혀 낯내기를 하지 않는 들꽃 같은 분이시다.

지난주에 보육원에 갔더니 한 여자 아이가 오카리나 선생님이라면서 작은 그림 하나를 내밀었다. 젊고 예쁘게 그려주니 기분이 좋아서 안아주었더니 붙든 손을 놓지 않는다. 훗날의 약속을 마냥 기다리는 아이들. 다행히 까불대는 아이들을 보면 괜히 미안해지던 마음의 무게가 덜어지기도 한다.

이어지는 선물들. 그러고 보니 내 삶이 온통 선물로 둘러싸여 있다. 받을 때마다 큰 기쁨이 있었기에 마음에 소중히 담는다.

언뜻언뜻 스쳐가는 얼굴들. 모두 선물들이다. 어제 오늘 만나는 모든 이들이 나에게 온 다름 아닌 선물들이었다. 유원한 광년의 흐름에서 만난 이들과의 인연이 어찌 보면 지고한 섭리일 터. 이제야 어렴풋이 눈을 뜬다. 그리고 슬며시 반문한다. 나는 이들에게 어떤 선물로 살고 있는가라고. 일순 작아지는 나를 본다.

간혹 하루해가 기울고 어둠이 찾아들 때의 고요함과 마주한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는 오늘 하루를 저녁 어스름에 실려 보내는 나만의 기도다. 때로는 성가를 연주하며 희어진 마음으로 새 날을 맞으리라는 간절함도 얹어본다.

오늘도 평온한 하루가 지나간다. 연둣빛으로 찾아오는 새 봄을 맞으며 더도 덜도 아니게 한유한 나날, 이것 역시 그 분께서 내려주신 선물인 게다. 큰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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