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黎明)의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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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창, 신학박사·서초교회 목사

한국의 대중문화가 언제부턴가 온세상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K팝이 주로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끌었다면 TV 드라마는 세대 구분 없이 인기를 끌어왔다. 그런데 언제부터 한국의 TV 드라마가 세상의 관심을 끌 만한 드라마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일까?

우리의 TV 드라마가 언제부턴가 대형화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에 ‘여명의 눈동자’라는 드라마가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드라마 촬영에 동원된 엑스트라가 2만 명이 넘었다. 시청률이 60%에 가까웠다고 하니까, 드라마가 방영된 날에는 거의 모든 TV채널이 거기에 맞추어져 있었던 셈이다.

그 드라마는 1940년대와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후반으로부터 6·25 전쟁까지의 시기가 오늘날의 한국을 위한 ‘여명의 시간’이 되었다는 전제하에 드라마의 제목이 ‘여명의 눈동자’라고 정해진 셈이다. 아직은 어두운 밤인데 머지않아 새벽이 다가올 것이다. 새벽이 다가올 것이 분명한데, 그런데 아직은 깊은 어둠 속에 있다. 1940년대와 1950년대가 우리에게 바로 그런 여명의 시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이런 말을 했다. “인생은 미래에 의하여 만들어진다.” 인생은 희망에 의하여 만들어져 간다는 의미이다. 그와 반대로 단테의 ‘신곡’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여기 지옥에서는 모든 빛이 입을 다물어야 한다.” 모든 빛과 희망이 입을 다물어야 하는 곳이 지옥이라는 것이다. 오랫동안 희망이 입을 다물어야 했던 우리의 삶이 빛과 희망을 향하여 눈을 뜨고 입을 열려는 시기, 그게 바로 여명의 시간일 것이다.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주로 머리를 쓰는 생각이나 판단을 잠시 중단하려고 한다. 아이를 사랑하는 어머니는 아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기억하려고 하지 않는다. 누가 와서 그 아이가 저지른 잘못을 말해주어도, 학교 성적표에는 분명히 그 아이는 공부 못하는 아이라고 나와 있어도 사랑하는 어머니는 그런 쪽에는 관심이 없다. 아이를 사랑하는 어머니는 아이의 미래와 희망에 대해서는 과대망상의 증상을 보일 때가 있다. 우리 아이는 얼마든지 훌륭하게 될 거라고 철썩같이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의 과거와 어두움에 대해서는 등을 돌리려고 한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의 미래와 희망만 바라보려고 한다. 그와 반대로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은 미래와 희망을 등지고서 과거와 어두움에 집착하게 된다. 미래와 희망에 등을 돌린 채로 과거와 어두움의 포로가 되고 만다.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흐름은 이미 오랫동안 과거와 어두움의 포로가 된 듯한 분위기였다.

‘여명의 눈동자’라는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시대의 격류에 밀려 일본군이 되기도 하고 사회주의 혁명군이 되기도 하고 위안부가 되기도 했다. 어느 편에 있다 해도 그들끼리 서로 미워할 여유는 별로 없었던 듯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 시대의 사상 논쟁은 그때 그들의 역사를 되새기면서 현재의 갈등과 분노와 증오를 심화하고 정당화해 간다.

오래된 어두움과 문 앞에 다가온 희망이 교차하는 시간이 ‘여명’이다. 그 여명의 눈빛으로 서로를 그리고 우리의 미래를 바라볼 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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