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일신·공진학교 설립 참여…재선거 통해 입법의원에 당선
(82)일신·공진학교 설립 참여…재선거 통해 입법의원에 당선
  • 고동수 기자
  • 승인 2019.04.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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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혁, 조선 영조 때 대정현감
김도현, 애월초에 소유 토지 희사
김동빈, 가발 사업 대성…금성교회 5억 후원
김동식, 한시로 유명
김동수, 전남도립 제주의원 내과과장 등 지내…한림 근춘의원 개업
제주시 삼도2동 154번지에 자혜의원으로 발족된 1920년대 제주도립의원 모습으로 가운데가 본관이며, 왼쪽이 변소이다. 제주도립의원은 1927년 전남도립 제주의원으로 개칭됐다. 김동수는 전남도립 제주의원 내과과장을 지냈으며 이후 한림에 근춘의원을 개업했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제주시 삼도2동 154번지에 자혜의원으로 발족된 1920년대 제주도립의원 모습으로 가운데가 본관이며, 왼쪽이 변소이다. 제주도립의원은 1927년 전남도립 제주의원으로 개칭됐다. 김동수는 전남도립 제주의원 내과과장을 지냈으며 이후 한림에 근춘의원을 개업했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김도혁金道爀대정현감. 1776(영조52) 9, 한동악韓東岳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778(정조2) 7월에 진주영장으로 떠났다.

애월초 교정에 있는 김도현 기념비.
애월초 교정에 있는 김도현 기념비.

김도현金道鉉1880(고종17)~1967, 미 군정기의 입법의원. 일제강점기의 면장. 본관은 김해. 북제주군 애월읍 애월리<애월포>에서 김양순金亮淳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도현은 1908(융희2)에 제주목 주사主事, 1920년 애월면장으로 부임해 17년 간 재임했다.

제주도 신우면新右面에서는 유지有志 김도현, 문창숙, 김익수, 김용구 등의 발기로 1921년 가을 면내 교육진흥회를 조직, 협의한 결과로 신엄리<엄젱이>에는 백창유白昌由가 건축비 5000원을 내며 일신日新학교가 설립됐고 애월리에서는 주민 부담으로 5000원을 배당해 공진公進학교를 창설해 그 나머지 경비는 면경영으로 했다.

수업 중인 아동은 두 학교 합쳐 약 200명이 되었다.

김도현은 1923년 민립대학기성회 제주지부집행위원, 1926년 사립일신학교 재단 이사, 제주금융조합 감사, 1931년 신우면 어업조합장을 역임했다.

1940년 애월초등학교 운동장을 확장할 때 그가 소유 토지를 희사하므로 일이 성사됐다.

그는 과도정부 입법의원으로서 제헌국회의원을 선거할 선거법 등 18건의 법률을 제정했다.

이때 김도현 입법의원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이었다.

19468월 미군정 법령 제118호로 남조선과도정부 입법의원議院설치령을 공포하자 제주도에서는 구좌면 인민위원회 위원장 문도배文道培(39·세화)와 조천면 인민위원회 문예부장 김시탁金時鐸(36·조천)을 간접 선거로 선출했다.

그런데 두 입법의원은 상경 후 입법의원은 미군정의 들러리 의회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참여를 거부했다.

이에 19473월 재선거를 실시하자 애월리의 김도현, 서귀면 신효리의 오용국吳龍國이 선출되었다.

1952520일 초대 제주도의회 의회 선거를 실시할 때 그의 두 아들 김영희金瀛熙, 김선희金瑄熙가 북제주선거구에서 출마해 모두 당선돼 화제가 됐다.

조국 광복 후 그의 유덕을 기리어 입법의원 김도현 공덕비가 애월초 교정 한 모퉁이에 세워졌다.

김동빈金東彬1937~. 재미사업가. 본은 광산김씨 36, 문정공파 제주세걸공계 애월읍 곽지리 서상동 기독교 가정의 김정권金廷權과 어머니 고운성高雲性(금성)의 차남으로 태어나 부산으로 옮겨 배정고등학교 졸업. 동서대학東西大學 법학과를 수료했다.

서울에서 서울시경 외사과에 근무, 간호사 이향자李香子와 결혼하고 1970년대 일찍 도미했다.

가발업에 손대어 재력을 크게 모아 당시 미국 언론에 크게 알려졌다.

김동빈은 제주 최초의 금성錦城교회에 5억원을 후원했는데 이는 교회 집사였던 선친에 대한 보은의 표시였다.

그는 1982년 뉴욕한인경제인협회 회장, 평통뉴욕협의회 제78기 회장, 코람문화재단 이사장, 2008년 재미동부뉴욕제주도민회(초대회장 고광림) 회장에 당선됐다.

이때 4500여 명이 운집해 동년 9월 그에 대한 기대가 컸다.

동년 10월 고향에서 해마다 개최하는 탐라문화제에 참석하니 도민으로부터 대환영을 받으면서 정부로부터 모란장을 수훈했다.

한편 큰아들 한성翰成은 미국 마이애미대학을 나와 뉴저지에서 사업에 또 둘째 한교韓敎는 뉴욕대를 나와 뉴저지에서 사업에 몰두하고 있다.

김동식金東式문인, 일제시대 대정면 공무원, 호는 기산杞山. 한시를 잘 지었다.

김동식은 왜정倭政 초에 대정에서 면리面吏로 있으면서 고병오高炳五와 교유가 깊었다.

고향이 주성州城이라 하나 행적은 미상이다.

그의 필사본으로 기산시집杞山詩集’ 1권이 있다.

김동수金東秀1921(일제강점기)~1954 금성, 개업의사, 기독교 장로, 호는 근춘槿春, 광산김씨 36세손. 제주도청 김훈의 선친.

문간공파 세걸世傑공계 김도형金道亨의 아들로 금성리<모실->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성의전(서울대 의대의 전신)을 나와 현대의술의 개척자인 김유돈金有敦 밑에서 의술의 기초를 터득했다.

이어 모교 교장 세라-데츠오 <世良哲雄>의 알선으로 전남도립 제주의원의 내과과장을 지내고 일본인 의사 하야시-사도시 <林聰>의 지도 아래 초등학교 4년 졸업한 학력으로 1944년에 한지限地의사 자격 시험에 합격했다.

당시 연령에 미달됐으나 그의 재능을 인정한 모교 교장과 병원 내과과장의 특별 배려로 가능했다.

김동수는 일제말기에 의사가 없던 산남 중문리<중물>에 처음으로 가네미츠<金光>의원을 개업했다.

이후 해방이 되어 1947년 미군청에 의해 실시한 정규 의사醫師시험에 합격하자 모두 그의 재능과 기능에 놀랐다.

그는 1952년 초대 제주도의원 선거에 출마, 북제주선거구에서 14명을 선출하는 데 15위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이후 14위의 김상흡金相洽이 사임했지만, 법적으로 승계권承繼權이 없어 등원登院하지 못했다.

김동수는 한림에 근춘槿春의원 개업했고, 기독교 한림교회 장로長老를 지냈다.

이후 한림에서 34세 나이에 갑자기 타계하니 천재는 요절夭折하는가!’ 하며 모두가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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