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여는 신문
하루를 여는 신문
  • 제주신보
  • 승인 2019.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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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어젯밤에 많은 비가 내리더니 안개까지 껴 밖이 희부옇다. 잠은 이미 깼는데 신문을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해 뒤척이고 있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이야 손바닥 보듯 빤하지만 그래도 어떤 소식이 올지 궁금하다. 현관 앞을 지나는 빠른 발걸음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오늘은 날씨가 좋지 않아 늦어질 거라 생각했는데 제시간에 배달됐다. 신문은 갓 인쇄된 잉크 냄새가 생명이다. 반가운 마음에 아파트 마당을 내려다봤다. 혹 아르바이트하는 어린 학생은 아닌지. 빗길에 어떻게 왔을까. 비옷을 입은 배달원의 웅크린 뒷모습에 가슴이 뭉클하다. 빗물이 흥건한 마당에 오토바이의 미등이 붉은 꼬리처럼 흔들린다. 세상사 시끄럽고 다양한 얘깃거리를 가득 담아 다소곳이 반으로 접혀 왔다. 한 장 한 장 펼칠 때마다 활자는 비로소 생명을 얻어 깨어난다.

눈이나 비가 오는 날 비닐로 포장한 걸 받으면, 독자로 대접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흐뭇하다. 포장하느라 고생했을 이들의 정성을 생각하면 소홀히 읽을 수 없다. 차곡차곡 쌓인 신문 높이는 어느 교양지나 전문지 못잖게 무게가 느껴진다. 읽는 이에게 새롭고 유익한 기사를 제공하고자 현장을 숨차게 뛰어다니며 애쓸 관계자들. 이런 여러 과정을 거쳐 내게로 온 과정을 되짚고 보면, 노고에 비해 한 달 구독료가 너무 적다는 생각마저 든다.

오래전부터 중앙지와 지방지를 붙박아 구독하고 있다. 편애에 가까울 정도로 고집스러운 구독자가 되어 아예 자동이체 시켜 놨다. 내가 원하는 것을 택했다는 자긍심으로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한 언론사에만 집착하면, 혹 편향적인 사고로 흐를 수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익숙한 지면이 허물없는 친구 같아 나름 애독자로서의 신의라 여긴다.

요즈음은 신문을 구독하는 가구가 많이 줄었다. 젊은이들은 인터넷이나 휴대폰에서 손가락 하나로 세상과 소통하는 시절이고, 신문은 주로 노년들이 소일거리고 생각한다. 종일 매스컴에서 쏟아내는 소리도 일종의 공해다. 꼭 들어야 할 놓쳐서는 안될 것처럼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귀가 열리고 눈이 쏠리는 현실이 피곤할 때가 있다.

하루를 신문 읽는 것으로 시작한다. 가슴을 따뜻하게 데울 수 있는 편안한 기삿거리가 먼저 눈에 들어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이런 규칙적인 일을 하루라도 거르면 바깥으로부터 홀로 단절된 것처럼 답답하다. 각 언론사의 기사를 읽고 비교해 나름 판단해 받아들인다. 언어로 전해지는 것은 순간으로 물처럼 흘러 흔적이 없으나 활자는 다르다. 천천히 음미하며 생각하고 판단할 여백을 제공한다. 잠시 덮어 두었다 다시 들춰볼 수 있는 기록으로 소중하다.

기사는 사실에 대한 진실을 말하는 것에 용기와 책임이 따라야 한다. 나는 인터넷이나 SNS가 자유롭지 못하다. 신문을 보면서 필요한 정보를 메모하거나 스크랩해 두고, 필요할 때마다 요긴하게 쓰곤 한다. 언어로 얻는 것은 그 순간뿐이나 활자는 간직해 뒀다 꺼내 볼 수 있는 한 시대의 사회 기록물이 아닌가.

언제부턴가 신문을 펼치기가 두려워졌다. 불행하게도 나라는 늘 시끄럽다. 즐겁고 희망적인 얘기를 접하기 드물다. 무엇보다 서민들이 살기 좋아졌다고, 주름진 얼굴 가득 웃음꽃 피는 나라를 기다리는 심정은 누구나 다르지 않으리라. 신문이 궁금하지 않을 만큼 태평한 나라는 언제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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