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 19일 민주혁명의 변천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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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근필, 전 美버지니아주한인회 회장/논설위원

4·19는 서울에서 대학생들의 뒤를 따라 고교생, 시민 80만명이 합세한 민주혁명이다. 독재 정권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 일어났다. 마산 고교생 김주열 학생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죽고 바다에서 인양한 게 직접적인 시위의 원인과 동기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학생혁명을 민주혁명으로 수정해 헌법전문에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혁명 이념을 계승한다고 했다. 4월 19일 서울 대학생들이 시작한 혁명운동은 서서히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제주도학생들에게까지 이어졌다.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의 시위로 시작한 자유당정권 반시위는 29일까지 10일간 짧은 혁명 운동이었다. 시위하면서 대학생과 고교생, 서울시민 등 사망자 187명, 부상자는 6500명이 된다. 이날 자유당본부, 파출소, 서울신문사, 장관 집 등 많은 곳이 파괴됐다. 4·19민주혁명의 역사적 배경 줄거리를 파헤쳐보면 학생들의 한국근대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18세기 후반부터 1883년 한미외교수교, 한국과 미국의 실질적인 교류다. 한국 민영익 공사는 미국 워싱턴에 부임, 미국 루시어스 공사는 서울에 부임함으로써 한국은 국제무대에 출발하게 된다. 1941년 일본은 미국을 군사적 공격을 가한다. 태평양전쟁이다. 4년이 넘는 전쟁으로 희생된 미군과 민간인 약 6만명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미국에 항복과 동시에 한국은 해방과 자주독립을 찾게 된다. 국가의 주권은 찾았지만 평화는 오지 않았다.

해방의 기쁨은 두 개의 상반된 이데올로기 극한 사상 대립으로 1948년 제주4·3사건, 1950년 6월 25일 전쟁으로 한민족은 지금도 고통 받고 있다.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집권한 이승만 대통령은 장기 집권에 들어갔다. 야당 민주당 정치구호는 ‘못살겠다 갈아보자’ 홍보는 학생, 국민들의 마음속에 크게 자리를 잡았다. 드디어 1960년 3월15일 이승만 대통령은 부정선거로 당선됐지만 4월 18일 고려대학생 3000명이 광화문까지 시위를 주도했다.

귀갓길에 많은 학생들은 자유당 청년테러로 심각한 상처를 입혔다. 이 사건은 그날 밤 서울에 있는 대학생들에게 알려진 사실이다. 다음날 4월 19일 서울시청 근교 대학생들이 세종로, 경무대로 들어가려는 학생들을 향해 무차별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이승만 대통령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고 고교생, 서울시민 80만이 모였고, 내무부, 자유당본부, 파출소, 서울신문사 등이 불에 타버렸다. 고위급 인사 집도 파괴시켰다. 이날 오후 자유당정부의 행정능력은 종말을 알리는 완전 무방비 상태에 들어갔다.

오후 비상계엄령 선포와 치안은 육군이 맡았지만 데모 대학생들과는 친근감을 주어 서로 밀착 상태였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직에서 사임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길에 올랐다. 1공화국이 끝이 나고 2공화국 장면내각책임제는 10개월을 못 넘겨 1961년 3공화국 박정희 대통령이 이끄는 군사정부가 들어섰다.

한국 정치의 격동기 속에 한국 경제발전은 계속 이어졌다. 4·19민주혁명은 지금의 한국을 재생시킨 혁명이다. 제주도에는 민주혁명기념회가 있다. 필자는 협회이사로 활동하면서 협회임원들의 노고를 높이 평가한다. 노형동주민회가 지금 KCTV 건너편 공원을 기증했다. 기념탑은 도민이 낸 세금으로 5억원을 들여 민주혁명기념탑을 세웠다. 도의회, 제주도 정부에서 기금을 지원한 효과는 제주도 역사 속에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를 탄생시켰다. 이 말은 개인들의 자유롭게 경제 활동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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