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의 계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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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자 수필가

꽃바람이 분다. 긴 겨울 동안 솜털에 싸인 채 묵언수행으로 기다리던 꽃의 시간이 마침내 열린다. 비상하려는 하얀 새처럼 하늘 향해 핀 꽃들, 겨우내 어디를 다녀오면 저리 눈부시게 다시 피어날까.

이중섭거리 오르막길에 올해도 어김없이 피는 목련꽃을 바라보며 섰다. 이 길을 오르내리는 이들도 목련나무를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이 돌담에 기대어 화사하게 핀 목련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연인들은 서로를 담느라 여념이 없고 홀로인 이들은 셀카봉을 들고 한껏 예쁜 표정을 짓는다. 잠시나마 꽃 색으로 물드는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해마다 다를 것 없는 풍경. 내년에도 이 자리에서 목련은 묵묵히 꽃을 피우고 사람들은 꽃의 절정을 자신의 기억 속에 간직하려 하겠지. 그들 틈에서 나도 스러져간 한 컷의 봄을 그린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일학년을 막 마쳤을 때, 아버지가 부산으로 전근을 가게 되면서 나도 따라 전학을 가게 되었다. 낯선 곳에서 시작한 학교생활은 선뜻 친구를 사귀지 못했고 한 학기가 지나도록 적응하지 못했다. 단순 학습의 반복과 당시만 해도 제주를 오지의 섬으로 알고 있던 또래의 아이들에 둘러싸여 이국인을 바라보듯 한 그들의 시선이 불편하게 느껴질 때면 언뜻언뜻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찰랑거리는 단발머리에 얼굴이 유난히 하얀 아이. 그 애와는 친하게 지내진 않았어도 이름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천방지축 또래의 아이들과는 다르게 조용히 앉아 무언가를 끄적거리거나 창밖을 바라보던 모습에 끌려 혼자 좋아했던 아이. 억센 사투리 속에서 누구하고도 친하지 못해 겉돌던 몇 개월 동안, 왠지 그 아이가 곁에 있었다면 나를 달래줄 것만 같았다. 주소를 알면 편지라도 주고받으면서 위안을 받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한 학기가 지나고, 차츰 학교생활에 익숙해지면서 그 아이에 대한 기억은 서서히 마음속으로 가라앉았다.

그 아이를 다시 만난 건 학교를 졸업하고였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소식도 모르는 채 살다가 만났지만 첫 눈에 알아보았다. 어색한 표정으로 서로를 알아봤지만, 시간이 흐름을 간직한 우리는 이제 아이가 아니었다.

몇 번의 만남에서 음악을 듣거나 바닷가를 걷거나 읽었던 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일주일이 멀다하고 서귀포와 제주시를 오가는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한라산을 넘어가고 넘어왔다. 시인이 꿈이던 그녀는 밤새 쓴 시를 보여주며 내게 느낌을 묻기도 했다. 사십여 년이 흐른 지금 시 구절을 기억할 순 없지만 주로 꽃에 대한 시가 많았다.

빈 가지에 구름처럼 피어나는 목련꽃을 좋아하는 그녀는 3월이 오면 나를 데리고 목련나무 아래로 갔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기대어 돌아온 봄의 숨결을 엿들으며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이 소리가 들리니?’ 혼잣말인 듯 내게 말을 걸며 나무에 기대어 선 채 목련꽃을 보는 건 지 허공을 응시하는 건지 꿈을 꾸는 듯 몽롱한 표정이 어른거린다.

어느 봄날인가, 학교운동장에서 놀다가 목련나무그늘에 떨어져 흥건히 젖어있는 목련꽃잎을 보았다. 열다섯 소녀의 눈에 갈색으로 변해버린 하얀 꽃잎은 그냥 지저분하게만 보였다. 하늘 향해 하얀 꽃잎 열던 고고한 모습은 어디로 가고 초췌한 형색으로 바닥에 누웠는지. 다른 꽃들은 바람에 몸을 실어 하르르 하르르 날아가고, 제 꽃 색 그대로 떨어져 눕는데 목련꽃은 피고 지는 모습이 너무나 달랐다. 그 후로도 한동안 그녀가 목련에 관해 이야기 할 때면 꽃 지는 모습이 지저분해서 싫다고 했었다.

어느 순간 바람결이 바뀌듯이 성숙한 여자가 되는 순간은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에 품으면서 자연스레 찾아온다는 것을 그녀에게서 보았다. 목련꽃을 좋아하는 감수성 깊은 소녀로만 알고 있던 나에게 심장을 뛰게 하는 남자를 만났다며 얼굴을 붉히던 모습이 어찌나 곱던지.

 

목련이 피고 지고, 세 번의 봄이 지나갔다. 그 사이 그녀가 사랑하던 남자는 결혼을 했고, 그녀는 이듬해 목련이 지는 계절에 침묵 속으로 떠나고 말았다.

목련의 계절은 짧다.

하얀 순정 모두 태우고 떠나버린 그녀의 넋인 양, 올해도 목련꽃이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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