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缺乏)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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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있어야 할 게 없어지거나 모자란 걸 결핍이라 한다. 사랑의 결핍, 지도력의 결핍…. 부모를 여읜 아이에겐 사랑이 모자랄 것이고, 이끄는 힘이 부족하면 조직의 기반이 흔들린다. 결핍이다.

온전히 채워진 만족이란 없다. 삶 자체가 결핍 속에 있는 건지도 모른다. 영양결핍이라든가, 꿈은 결핍에서 나온다고 한다. 축나서 비어 있거나 모자란 그 상태만을 뜻하지 않고, 모자라고 축난 걸 채우려는 의지의 발현을 의미하기도 할 테다. 그렇다면 결핍은 단지 힘들어 채워내려는 행위만이 아니다.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에너지를 포함할 것이다.

그동안 결핍이 나를 얼마나 연단(鍊鍛)해 왔는가. 또 고생고생하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과정은 애면글면 얼마나 힘겨웠었나. 불편하고 속 보이고 고통스럽고 때로는 주눅 들기도 했을 게 아닌가. 까딱했으면 자신을 절망의 수렁으로 몰아넣을 뻔한 고비를 몇 번인가 넘겼을 것이며.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뒤늦은 인식에서 보다 더 명료해진다. 결핍이 꿈 곁에, 바로 꿈과 인접해 있음을 알고서 자지러지게 놀란다. 꿈은 결핍이란 온상에서 자란다. 결핍 위에 둥지를 튼다. 갖고 싶은 게 없을 때, 이루고 싶은 걸 못 이뤄 허탈할 때, 축난 걸 채우지 못해 불만스러울 때, 거기다 깃대를 꽂고 흙을 메우는 게 꿈이다.

풍요는 만족이다. 더 움직이려 않고 사람을 나태하게 만든다. 안락이란 것도 편안만을 추구해 무얼 성취하려 일깨우는 동기가 없다. 팔 걷어붙여 힘 기울이는 과정에서 맛보게 되는 샘솟는 기쁨이 없다. 더욱이 황홀한 창조의 희열을 맛보지 못한다. 발견의 보람을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지금 누리고 있는 안이함·편안함을 특별한 것으로 생각지 않는다. 의당 있을 것이 있는 거란 타성의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애초에 있었고 그것은 또 오래 곁에 있어 풍요로움이 그대로 유지될 거라는 믿음은 아무런 감사의 마음도, 별난 감동도 주지 못한다. 축난 걸 채우고 모자란 걸 메우기 위해 안간힘 쓰며 악전고투(惡戰苦鬪)할 때의 가팔랐던 숨결, 긴장했던 표정, 순간순간 타오르던 눈빛, 목매어 터져 나오던 절박한 그때의 음성이 없다. 결국 지난날의 회상 속에 가슴 쓸어내릴 애틋한 추억마저 소멸해 버린다. 흔적으로 되살아나지 못하는 서사는 허망할 뿐이다.

1930년대 《동백꽃》의 작가 김유정은 결핍 속에 결핵을 앓아 각혈하며 스물아홉 살 요절할 때까지 30편의 소설 창작에 매달렸다. 몹시 숨찼으리라. 오죽 했으면 출판사 하는 친구에게 “외국 소설을 번역할 테니 고료 좀 보내줄 수 없겠나. 아무래도 구렁이 몇 마리 고아먹어야겠네.”라 애소했을까. 극한의 결핍 속에서 명작이 나왔던 역설이 우리를 머리 숙이게 한다.

불만스러운 상태가 오히려 글을 쓰게 했다면, 수긍하게 되는 것은 불만을 창작으로 다스리려는 불붙는 의지가 그 결핍에서 나온다는 데 있다. 내 글쓰기의 동기도 결핍과 더러 무관하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한다. 욕구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현실의 ‘텅 빈 부재’에 대한 대응논리로 나타난 구체적 작위가 글쓰기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시나 수필 한 편 쓰고 난 뒤, 어깨 들썩여 가며 환호하는 어설픈 성취감도 때론 외로운 영혼에게 위안이 되고 있을 것 같으니 하는 말이다. 비단 글에 그치지 않으리라. 사람의 일은 결핍 속에서 성취되는 그 무엇일 것인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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