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공직 접고 6·25 참전…소대장으로 설악산 고지서 산화
(83)공직 접고 6·25 참전…소대장으로 설악산 고지서 산화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김동익, 남제주군수…국궁 유치 노력
김동인, 조천 만세운동 참여 
김동하, 모슬포 해병대 부대장
김동환, 조천면 초대 여맹위원장
김동희, 도청 근무 중 육군 지원
김두경, 혁명적 농민조합 창립 주도
1946년 1월 제주항 전경으로, 육지에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 해군들이 사용했던 ‘구르마(손수레)’가 보인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1946년 1월 제주항 전경으로, 육지에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 해군들이 사용했던 ‘구르마(손수레)’가 보인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김동익金東翼1916(일제강점기)~2014, 교육행정가, 남제주군수, 호는 한봉漢峰, 본관은 광산, 애월읍 곽지리<-오름>에서 면헌勉軒 김정언金廷彦의 장남으로 태어나 35녀를 두었다.

김동익은 제주농업학교 3년을 거쳐 일본 기후현<崎阜縣> 현립縣立 군상郡上농림고등학교 5년을 졸업하고 이어 광주사범 강습과를 수료했다.

그는 제주남교 교장을 거쳐 제4대 도지사 김용하金容河의 발탁으로 제주도 서무과로 옮겨 재임하게 됐다.

제주도 학무과장, 1959년 제9대 남제주군수를 두 차례에 걸쳐 역임했다.

19604·19 이후 양제박 제주도지사에 의해 학무과장이 되어 학생교육을 정상화하려고 힘쓰며 장학관 양치종梁致鍾을 삼고초려 끝에 등용을 했다.

그는 제주도교위(현 제주도교육청) 관리국장, 19615·16 이후 제주시교육장을 지내고 정년퇴임했다.

김동익은 체육 만능 선수로 활약했고 특히 국궁國弓을 제주로 유치해 보급에 열정을 바쳤다.

그는 대한궁도협회 제주도지부장으로서 한라정漢拏亭의 사두射頭였다.

또한 올림픽 제주시추진위원장, 대한교육삼락회 제주도지부장, 대한노인회 제주도지부장 등을 거쳤고, 향년 99(백수白壽)로 타계했다.

김동인金東仁1898(광무2)~?, 독립운동가. 마을 용인庸人, 기미년 조천 만세운동의 항일활동. 조천읍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1919321일부터 24일까지 4일 간에 걸쳐 조천·신촌·신흥·함덕 등지에서 독립을 절규하는 시위운동이 전개됐다.

김동인은 이 일로 체포돼 동년 426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소위 칙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 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때 항일운동으로 1심에 기소된 자는 모두 29명이고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집행 유예로 9명이 풀려나고 14명은 항소하자 대구복심법원에서 실형이 확정되기까지 옥고를 치르게 됐다.

일본으로 건너가 1930우리는 우리 배로라는 표방 구호로 동아통항東亞通航조합(조합장 문창래)을 창립하는데 김달준金達俊, 현석헌玄錫憲, 현길홍玄吉弘 등과 함께 관여, 제주도민 스스로 자주운항을 실현해 일제의 착취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1929829일 신간회 확대회의에서 김문준이 검사위원장에 취임할 때 그는 집행위원이 되었다.

김동하金東河해병대 장교, 19491228일 독립제1대대로부터 제주4·3사건의 토벌작전 임무를 인수한 해병대海兵隊(사령관 신현준)는 제주에서 토벌작전을 수행했다.

제주도 동남쪽에 주둔한 해병대 모슬포부대는 부대장이 김동하金東河소령이고, 그 예하에 제1대대(대위 김병호金秉鎬)와 제2대대(대위 김재수金載珠)로 편성해 제주도 일대의 경비에 임했다.

1대대는 제1중대(중위 한예택韓禮澤)와 제2중대(중위 김광식金光植)로 편성했다.

2대대는 제5중대(중위 정중철鄭重鐵), 6중대(중위 서정남徐廷南) 및 제7중대(중위 안창관安昌寬)로 편성해 남제주군 일대를 담당했다.

그리고 한림, 서귀포, 및 성산포에는 정보대와 헌병대를 배치했다.

김동환金東煥()조천면 초대 여맹女盟위원장 조천면 조천리 태생.

그녀는 8·15 이후 조천면 초대 부녀회장, 조천면 초대 여맹위원장 등을 지냈다.

김동환은 연설을 잘해 대중大衆집회 때의 일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

김동희金東禧1925(일제강점기)~1951, 제주도청 공무원, 순국 장교, 본관 광산 36세손 문간공파 세걸世傑공계, 금성리<모실-> 구장 김도원金道元의 외아들, 19453월 제주농업 35회 졸, 재학 시에 동기 박운봉朴雲鳳(곽지)과 전남도내 학교 대항 유도 대회에서 준우승했다.

일본해군에 징집 당해 일본군 생활을 했다.

해방 직후 애월면 서기, 도청 산업과 근무 중 1948년 청년방위대 제4기 간부후보생에 응모, 육군방위훈련학교 졸업, 소위로 임관, 6·25에 참전했다.

제주도청 직원이자 독자이면서도 육군에 지원, 20연대 2대대의 소대장으로 호남지구 전투에 참가했다.

이어 강원도 설악산雪岳山의 한 고지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부하들이 움직이지 않자 나를 따르라하며 맨 먼저 고지를 점령, 마침 적의 복병伏兵이 쏜 총탄에 전사, 이 장면 목격한 부하들은 돌격대로 변했다.

김동희는 중위로 추서追敍되어 오늘날 제주출신 순국 장교 제1호로 충혼묘지에 안장安葬됐다.

김두경金斗璟1910(융희4)~1936(일제강점기), 제주 청년동맹 및 제주도 혁명적 농민조합 준비위원회의 항일활동. 호는 철초鐵草, 본관은 안동. 한성전보사漢城電報司 주사를 역임한 김병원金炳元의 아들.

유명한 한학자 묵농墨農 김종현金鍾炫의 사위가 된 김두경은 1년 연상인 김기범金基範(김종현의 아들)과 항일동지로서 뜻을 같이했다.

그는 제주공립보통학교(현 제주북초등학교)를 거쳐 19293월 부산사립실업학교를 졸업했다.

특히 중등 학생 시절 체육 기능이 뛰어나 제주읍 산지의 용진회勇進會 축구 선수로 광주까지 원정한 바 있다.

또 독서회 활동을 통해 민족주의 사상에 고무돼 이를 젊은 동지에게 전파시켰다.

귀향한 후 농업에 종사하면서 제주청년동맹 읍내지부邑內支部에 가입, 항일 공산주의 운동가 강창보姜昌輔(용담)의 영향을 받으며 항일 이념을 다졌다.

193196국제 무산 청년 데이(Day)’에 청맹원靑盟員 송성철, 부태환夫泰煥, 김기범 등은 제국주의 전쟁 반대3개 항의 구호와 그에 따른 항일 운동 고취 문서를 작성, 인쇄하는 한편 각처에 배포했다.

또 동년 117일 러시아 혁명 기념일에 건입동 산지의 축항 공사 인부 40여 명을 직접 지도해 임금 인상과 구타 반대, 노동 시간의 단축과 노동조합의 조직 등을 요구하며 조직의 책임자 하철河徹(일명 河順哲)의 주도하에 10일간의 파업과 시위를 벌였다.

19331월 그는 김경봉金京奉, 부병훈夫秉勳과 함께 제주도 혁명적 농민조합 창립 준비위원으로 가담해 활동했다.

혁명적 농민 조합 준비위원회는 제주 청년동맹 좌파 출신인 그가 책임을 맡아 전도에 걸쳐 비밀 조직을 확대했다.

제주지역에서는 혁명적 농조農組운동에 대한 모색이 이루어졌으며 김두경은 전협계 활동가 강팽학康彭鶴과 함께 이를 주도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