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세이(平成)’와 함께 저물어가는 ‘헤이와(平和)’
‘헤이세이(平成)’와 함께 저물어가는 ‘헤이와(平和)’
  • 제주신보
  • 승인 2019.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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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정, 일본 치바대학교 준교수/논설위원

다음 달 1일에 거행되는 나루히토 왕세자의 즉위에 맞춰 일본에서는 30년간 사용되어 온 ‘헤이세이(平成)’라는 연호가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한 세대를 100년으로 볼 때 30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헤이세이 시대를 절반이나 넘게 살아온 필자로서는 친숙하고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연호였기에 헤이세이가 저물어 가는 것이 조금은 아쉽다. 헤이세이 30년은 세계와 일본에게 있어 어떤 시대였을까? 1989년 ‘쇼와(昭和)’ 천왕의 사망으로 막이 오른 헤이세이 시대는 세계적으로도 많은 사건과 격변의 해이기도 하다. 중국에서는 천안문 사건이 일어났고, 독일에서는 냉전의 상징이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자유왕래가 시작됐다. 그리고 그해 12월에는 미국과 러시아(구소련)의 냉전 종식 선언이 있었다. 이를 시작으로 세계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탈냉전’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 재편되어 갔다. 일본 내부적으로는 부동산 버블이 피크에 달하고 ‘잃어버린 20년’이라는 장기불황의 돌입을 앞두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1989년 국외여행이 전면 자유화가 시작됐다. 정치적으로는 1987년 민주화를 거치며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돼가던 즈음 문익환 목사의 방북을 계기로 다시 공안 정국으로 들어갔다.

이렇듯 격변하는 세계와 함께 막이 오른 헤이세이 시대는 사회적으로는 평화와 공존의 가치가 올라가고, 경제적으로는 규제의 완화와 자유화가 진행된다. 그리하여 사람과 물건과 돈이 국경을 넘나들며 세계는 지구촌이 하나가 되는 글로벌 시대를 맞이한다. 글로벌 시대의 시작으로 세계는 국경을 넘는 이동이 더더욱 빈번해진다. 유럽의 통합과 함께 이민자의 수용과 다문화정책이 세계적인 이슈로 떠올랐다. 일본에서도 외국인의 이주가 증가하고 제한적 방안이기는 하지만 이주민들과의 갈등을 줄이고 함께 공존하기 위한 ‘다문화 공생’의 가치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학계에서는 글로벌리즘과 다문화주의, 이민 수용을 둘러싼 담론이 주된 논쟁거리로 떠올랐다. 일본 사회는 글로벌이라는 세계의 거대한 흐름 속에 다양한 집단을 인정하고 공생하는 열린사회로 나아가는 듯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이 흐르고 세계는 다시 ‘글로벌화’라는 패러다임을 재고하기 시작했다. ‘글로벌화’에 반대하는 운동과 움직임이 세계 각국에서 일어나고 이민의 유입을 반대하는 정책도 다시 고개를 든다. 일본도 예외는 아니다. 극우주의를 내세운 아베 정권이 헤이세이 시대의 거의 3분의 1을 집권하면서 중립적이고 열린사회를 지향하던 사회적 분위기는 사라지고 있다. 70년을 넘게 함께 살아오면서도 다른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도를 넘는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가 부활한다.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보통 국가로 전환하기 위한 헌법 개정도 진행 중이다.

다시 헤이세이라는 연호 얘기로 돌아가서 ‘헤이세이(平成)’라는 연호에는 ‘천지(天地), 내외(內外) 모두 평화가 달성된다’는 뜻이 담겨있다. 전쟁과 식민지 통치로 인해 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던 쇼와(昭和) 시대를 뒤로하고 헤이세이 시대가 이루고자 했던 헤이와(平和)의 가치는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헤이세이가 저물어감과 동시에 평화로운 시대도 함께 저물어 가는 것일까? 이어지는 ‘레이와(令和)’라는 새로운 시대가 헤이세이가 지향했던 길을 역행하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가 필자의 너무 나간 노파심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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