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오후
할아버지의 오후
  • 제주신보
  • 승인 2019.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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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순 수필가

오후 2시가 되면 초등학교 저학년 수업이 끝나는 시간이다. 이에 맞춰 학부모들이 학교 정문 앞에서 아이를 기다린다. 아이를 집으로 데려가거나 자동차로 학원에 보내기 위해서다. 나도 젊은 학부모 틈에 끼어 학교 수업이 끝난 외손녀를 태권도장으로 자동차에 태워 보낸다. 태권도장에서 다시 피아노 학원으로 보내지고, 엄마가 퇴근할 때 집으로 데려간다. 요즘 초등학생을 둔 대다수 학부모가 겪는 일상의 단면이다.

맞벌이 딸네 외손녀의 학교·방과 후·학원 생활 일정표가 엄마의 퇴근 시간에 맞춰 빈틈없이 꽉 짜여있다. 그 틈새를 연결하는 역할이 나의 오후 일과이다. 딸네 형편상 할아버지인 내가 감수해야 할 일이라 여겨진다.

손주를 건사하는 일은 처음이 아니다. 아들네도 맞벌이라 3년 전까지 친손자 둘을 지금처럼 뒷바라지했다. 이제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 스스로 도서관에 가거나 놀다가 시간에 맞춰 학원으로 간다. 이들 뒷바라지가 끝나니 지금 외손녀를 보게 되고, 다섯 살 외손자가 하나 더 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역할은 어디까지일까. 자식이 학교를 마친 후 취직하고 출가시키면 이제 끝이라 생각하는데 현실이 그런가. 손주가 생기면 이들을 건사해야 하는 조부모 역할이 새로 주어지는 것이 인생 여정이다.

맞벌이 부부에겐 학교 수업이 끝난 아이와 부모 퇴근 시간의 틈을 메워줄 사람이 필요하다. 할아버지인 내가 도맡아 하는데, 내가 볼일이 있을 때는 아내가 대신한다. 손주를 돌보는 할아버지의 역할이 조금 번거롭기도 하지만, 손주들이 밝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을 찾는다. 자식이 결혼을 하지 않아 손주도 없고, 직업도 없는 자식을 둔 부모들을 생각하면 괜스레 미안한 생각마저 든다.

요즘 아이들은 엄마 품에서 재롱을 부릴 시기에 어린이집에 맡겨진다. 초등학교에 가도 아침에 집에서 나오면 학원에서 온종일을 보낸다. 학원에 맡겨놓은 아이를 걱정하며 직장에서 애쓰는 아들딸이 안쓰럽고 손주들이 애처롭다. 무한경쟁의 현대사회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맞벌이 부부의 고단한 일상이다.

내 친구는 마흔을 넘긴 두 딸이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다니는데도 출가를 못 시켜 그간 속앓이를 했다. 모임에서 자식과 손주 이야기가 나오면 불편해했는데, 다행히도 올해 두 딸 모두 혼사를 치른다고 한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해 하는 친구를 보면 내 일처럼 기쁘다. 자식을 출가시키지 못해 애끓는 부모가 어디 이뿐이랴.

현대사회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생활은 편리하고 물질적으로 풍요해졌다. 하지만, 빈부의 격차는 더 벌어지고 삶은 팍팍해졌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지 않고는 아무리 노력해도 집 한 채 마련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집과 직장을 마련치 못해 결혼을 못 하고, 결혼해도 자식을 키울 형편이 못 되니 출산을 포기한다. 인구절벽으로 초 고령 사회가 되는 우리나라의 미래가 암담하다.

다행히도 내 아들·딸네는 맞벌이 직장인으로 잘 살고 있는데, 아이들을 건사하는 일이 걱정이란다. 자식들의 걱정인 손주들을 내가 돌봐주고 있으니 고민 해결을 돕는 셈이다. 손주들을 돌보는 보편적인 일상이지만, 이 역할이 삶의 보람으로 승화되며 작은 행복감을 느낀다. 나의 유년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이 달라진 세상. 어느덧 할아버지가 되어 손주들을 돌보고 있는 자신을 되돌아보니 격세지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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