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생기
삶의 생기
  • 제주신보
  • 승인 2019.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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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언 수필가

요즘 어떻게 지내?”

그럭저럭. 사는 게 뭐 별거냐.”

오랜만에 허물없는 친구나 동창을 만날 때면 주고받는 인사다. 저마다 제 빛깔로 걷고 있겠지만 인생의 총론은 오십보백보일지 모른다.

고희를 넘어서고 돌아보는 생이란 굉장한 것들이라기보다는 소소한 것들임을 자각하게 된다. 물론 생사를 넘나들기도 하고 고통과 절망의 벽을 두드리기도 하며 묵묵히 질곡의 길을 헤매기도 했을 테다. 그러나 생채기로만 이어지는 삶은 드물다. 굵은 빗속에서도 마음의 햇살을 받을 수 있는 게 인간의 축복이려니 싶다.

4월 초순이면 양지바른 울담 곁에서 소박하게 웃고 있는 모란꽃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곤 한다. ‘찬란한 슬픔으로 봄을 꽃 피운 김영랑은 어떤 모란에 몰입했을까.

크고 화려하여 꽃 중의 왕이라 불리며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목단은 다양한 원예종이 재배된다. 여러 해 전 오일장에서 자그만 목단 한 그루 사다 심었었다. 어떤 꽃이 피어날까 무척 궁금했다. 화장기 없는 하얀 꽃잎, 원시의 시간을 간직한 듯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웃한 빨간 장미나 노란 후레지아의 농밀한 색채에도 맞댈 수 없다.

몇 년 바라보노라니 매력이 다 빠져 버려 고개를 돌리게 된다. 참된 진리는 현란하지 않고 단순 소박하다는 걸 깨닫지 못함이다. 어쩌랴, 내 시선이 화려함으로 기우는 것을.

며칠 전 봄꽃을 구경하려 오일장을 찾았다. 각양각색의 꽃들이 화사하다. 진선미의 압축판, 그 속에 우열이나 시비가 존재할 수 있으랴. 각자의 기호에 따라 품을 뿐이다.

하고 탄성을 지를 뻔했다. 샛노란 칼라꽃이 블랙홀처럼 내 마음을 빨아들여서다. 트럼펫을 불어대는 첫인상이 전신으로 흘렀다. 내 뜰에도 칼라꽃이 피지만 흰색이다. 으레 그런 색이려니 생각했는데 인간의 창의성이 놀랍기만 하다. 기꺼이 지갑을 열고 품에 안았다.

과실나무와 꽃나무를 파는 가게에서 목단을 만났다. 봉오리조차 맺지 않은 어린 화목이다. 빨간 겹꽃이 핀다는 주인의 말에 한 그루 사고 시장을 빠져나왔다. 집에 오자마자 정원의 양지바른 곳에 삽질하고 심었다. 넉넉히 물을 주며 잘 가꾸겠노라고 속삭였다. 이로써 내년 봄을 기다리는 설렘 하나 간직하게 됐다. 살아갈 활력이라도 숨겨 놓은 기분이다.

얼마 전 바사모 회원들과 바다 정화 활동을 나갔었다. 가는 길에 짬을 내어 도두봉에 올랐다. 처음으로 섬머리島頭 공원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짙푸른 망망대해와 도두항이 그림으로 다가왔다. 방향을 바꾸면 멀리서 오름과 한라산이 손을 흔들었다.

그때 스마트폰이 울렸다. 원고를 청탁하는 신문기자의 메시지였다. 응답 중에 도두봉 정상에 서니 자연이 참 포근합니다.’라고 했더니 이런 좋은 날씨에 자연 속에 계시다니 부럽습니다.’라고 답장을 보내왔다. 그렇다. 일터에서 삶을 짊어진 사람과 자연 속에서 삶을 누리는 풍경은 사뭇 다를 것이다. 내가 누군가의 부러움의 대상일 줄은 몰랐다.

저녁 시간에 아내와 동네 길을 걷고 돌아오다 이웃에 홀로 사는 할머니와 마주칠 때가 있다. 체구가 작고 인상이 곱다. 안녕하시냐고 인사를 드리면 둘이 걷는 모습이 참 좋습니다.” 하고 응답하신다. 여러 마디 나눈 적은 없다. 팔십 줄에 들어섰을 얼굴인데 말씀이 고상하다. 조그만 마당엔 수선화 후레지아 송죽엽 들을 키우신다. 함께 걷는 우리 모습이 잊힌 시간을 불러내는 것일까, 음색이 애틋하다. 간혹 따님으로 여겨지는 사람이 찾아와 도란거리는 이야기가 길가로 새어나기도 한다. 사연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그제 아침 버스 정류소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아저씨가 망사에 무언가를 담고 지나다가 혼잣말을 했다. 관상용 가지인데 방울들이 노랗게 익으면 볼만하다며 키워 길가에 심겠노라 한다. 한 개 주면 안 되겠냐며 용기를 내었더니 마른 열매 세 개나 건네줬다. 횡재한 느낌이었다. 뜰에 심으니 삶의 활력 하나가 또 생겼다.

삶도 시들지 않게 가꿔야 한다.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는 것, 기다릴 일을 만드는 것, 이런 것들이 삶의 버팀목이다. 작은 것에도 생기 돋는 아름다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