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모발)의 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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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동수 논설위원

동양의 옛 문화권에서 몸에 난 털(모발)은 불가침의 영역이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는 중국의 효경(孝經)의 첫 장 개종명의(開宗明義) 편에 등장한다. 자신의 신체와 모발, 그리고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이것을 손상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는 뜻이다.

머리털을 지키는 게 효의 시작이니, 이를 자른다는 것은 불효이기에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구한말 단발령(斷髮令)에 맞선 을미의병을 보면 알 수 있다. 1895년 일제의 강요로 단발령을 내려 고종을 필두로 성인 남자들에게 상투를 자르라고 명하자 전국에서 민초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서양의 옛 문화권에서 털은‘미운털’이나 다름없었다. ‘털-수염과 머리카락을 중심으로 본 체모의 문화사’에 따르면 고대 이집트 신전에서는 제례의 한 부분으로 털 뽑기가 행해졌다. 신들의 몸에는 털이 없다고 믿었다.

로마 상류층 여성들은 바닷조개를 족집게처럼 사용해 종아리 등에 난 털을 뽑았다. 그리스에선 등잔불로 털을 지져 없앴다.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체모 면도’라는 고문을 당한 셈이다. 이를 감당해야 하는 쪽은 여성들이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작품 모나리자에는 눈썹이 없다. 이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서 여러 의견이 있지만, 그 당시 유행이던 제모(除毛)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견해도 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19세기 여성해방운동이 일어나면서 털의 운명은 개인의 자유 의지에 따라 결정됐다.

▲요즘은 털의 수난 시대다. 유명인 마약 사건이 터지면서 제모와 삭발, 염색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한쪽에선 마약 투약 흔적을 감추기 위해 털을 없애고 있으며, 다른 한쪽에선 투약을 입증하기 위해 압수수색 대상에까지 넣고 있다.

털이 마약성분을 감추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혈관을 통해 돌아다니던 마약 잔류 물질은 모세혈관을 통해 털에 들어간 뒤엔 빠져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몸 밖으로 쉽게 마약성분을 배출하는 소변과는 다르다. 털은 길이에 따라 최대 1년이 넘는 기간까지 마약 투약 여부를 확인해줄 수 있다.

우리 몸의 털은 삶의 축적이요, 기록이다. 그때의 일을 기억해 증언하고 있다. ‘미운털’이라며 온갖 트집을 잡아 지우려고 해도 소용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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