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한라산 무장대 제주방송국 습격…직원 3명 납치·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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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규, 제주방송국 과장…4·3 때 희생
김두봉, 제주기독청년회 조직 
김두삼, 향토사학가…법정사 항일 활동
김두석, 건국훈장 애족장 받아
1950년대 초창기 제주방송국의 모습으로 3개의 나무를 연결해 만든 안테나가 특이하다. 당시 제주방송국 방송과장 김두규 등 3명은 1952년 제주4·3사건으로 한라산에 입산했던 무장대에 의해 희생됐다. 순직한 3명의 사원들에 대한 추모비는 41년이 지난 1993년에야 KBS제주방송총국에 세워지게 됐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1950년대 초창기 제주방송국의 모습으로 3개의 나무를 연결해 만든 안테나가 특이하다. 당시 제주방송국 방송과장 김두규 등 3명은 1952년 제주4·3사건으로 한라산에 입산했던 무장대에 의해 희생됐다. 순직한 3명의 사원들에 대한 추모비는 41년이 지난 1993년에야 KBS제주방송총국에 세워지게 됐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김두규金斗奎1934(일제강점기)~1952, 제주방송국 방송과장放送課長, 순직 공무원.

제주-성안’ 19529월 재산在山 무장대가 침입, 방송과장 김두규와 18세의 기술견습공 및 어린 급사 등을 납치拉致하고 방송국에 걸렸던 시계와 전화기를 약탈 도주했다.

김두규 등 3명은 M-199식 다발총으로 무장한 그들에 의해 변을 당했다.

제주4·3사건으로 한라산에 입산했던 좌익 무장대가 제주방송국을 기습해 직원 3명을 살해한 사건은 우리나라 방송 초유의 일대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사건발생 후 전투경찰대 수색대는 귀순 무장대원의 정보 제공으로 사건 발생 몇일 뒤 현재의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선흘-> 야산에서 죽창으로 무참히 찔려 살해된 뒤 구덩이에 묻혀 풀과 나무로 위장됐던 시신 3구를 찾아내 호송했다.

이들 순직대원들의 장례식은 924일 제주방송국장으로 엄수됐는데 당시 김두규 방송과장은 22녀를 둔 가장이었으며 채종식은 채용한 지 6개월 그리고 김석규는 채용 2개월 만에 참변을 당하며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신문에서는 시신을 찾아 호송하는 과정을 생생히 보도했다.

방송현장에서 순직한 3명의 사원들에 대한 추모비는 이들이 순직한 지 41년이 지난 1993년에야 KBS제주방송총국에 세워지게 됐다. <제주방송국70년사>

김두봉金斗奉1887(고종24)~?, 제주기독청년회의 항일 활동. 향토사학가. 민족 계몽 운동가.

호는 신천信天, 제주시 일도리<제주-성안>에 거주했다.

그는 1932제주실기를 지어 제주향토사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제주실기는 일제강점기에 심재心齋 김석익金錫翼탐라기년진재震齋 이응호李膺鎬탁라국서乇羅國書와 함께 민족혼을 진작시킨 제주의 삼대 향토사서라고 할 수 있다.

해방 후 그의 아우 김대봉金大奉은 초대 제주도감찰청장을 역임했다.

일찍이 기독교 성내교회의 신자로서 192512월 신재홍申才弘(우도), 고창현高昌炫(성내), 김대봉金大奉(김두봉 동생) 등과 함께 제주기독청년회를 조직했다.

특히 그는 한문에 조예가 깊어 영주음사瀛州吟社 회원으로 제주 향토에 관한 한문 문적 발굴에 힘썼다.

탐라기년탁라국서는 한문체의 향토 역사서이어서 극소수의 한학자에 의해 익혀졌을 뿐이었다.

이를 착안한 김두봉은 크리스찬으로서 성서가 한글화되면 서민 대중에게 기독교 교리가 널리 전파될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일본으로 들어온 제주 유이민流移民들은 제주의 역사를 한글로 익혀 향토애·조국애·민족애를 일깨우고자 했다.

예상이 맞아 떨어져 19322제주실기초판이 오사카에서 발간하자마자 곧 절판돼 1936년까지 4판이 나왔고 그 뒤에도 이어졌다.

제주실기는 제주 역사를 대중화하는 데 가장 성공한 책이다.

책의 부록 1장에서는 조선조 숙종·영조·정조·순조 임금의 윤음綸音들을, 또 제2장에는 관해官廨의 이건기移建記, 중수기, 한라산기 등 기문記文, 3장에서는 상량문을, 4장에는 한시를, 5장에는 과환科宦, 6장에는 선생안先生案 등을 한문 원본대로 게재했다.

따라서 해석하기 쉽게 반드시 한문에 토를 달아 읽는 데 편리하도록 배려했다.

필자의 변 : 선친께서 20대 젊은 시절 일본에 처음 갔을 때 제주교포들은 노동 현장에서 김두봉이 지은 제주실기를 대단히 호감이 가는 서적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럴 것이 일본에게 나라가 망한 지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친은 일본의 노동현장에서 적응하지 못한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술회했다. 첫째 일본어에 능통하지 못한 점, 둘째 노동현장에서 일본인들이 너무나 폭압적인 점, 셋째 경상도와 제주 사람들이 많아 기죽지 않고자 서로 뭉쳐 싸움질이 일어나기 일쑤였던 점이다.

김두삼金斗三1883(고종20)~1919(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무오년 법정사에서 항일운동. 본관 김해, 김천년金千年3, 중문면 영남瀛南리에서 태어났다.

김두삼은 191924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복역 중 1919821일 오전 11시 광주감옥 목포분감木浦分監에서 옥중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김두석金斗石()1915(일제강점기)~?, 항일운동가, 평양 여자신학원의 신사참배 거부 및 전쟁 반대의 항일 활동. 교사. 서귀포 정동규鄭桐圭의 부인. 본명 정희貞熙, 경상남도 마산시 성호동에서 아버지 김규태와 어머니 허영이의 딸, 일제의 신사참배와 우상숭배를 거부했다.

김두석은 1930년 동래의 사립 일신日新여학교를 졸업하고 1934년 모교의 교사로 취임했고 이후 신사참배 거부 사건이 일어났다.

193710, 총독부總督府에서는 각급 학교에 신사참배는 국가 의식이니, 교장과 교사들의 인솔 아래 신사에 데리고 가서 참배시켜라.”고 했다.

193899일 조선예수교 장로회 제27차 총회에서는 신사참배를 국가 의식으로 받아들였다.

이를 거부한 평양신학교는 문을 닫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김두석은 교회 안에서 하는 동방요배와 일장기日章旗에 대한 경례마저 거부했다.

일제의 신사참배의 강요에 완강히 저항, 기독교인으로서 우상을 숭배할 수 없다고 끝내 거절하고 교직에서 물러났다.

평양 여자신학원이 지하 활동을 통해 약 30여 명의 여학생이 비밀 수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상동韓尙東 목사에 의해 알게 되고 한목사의 도움으로 19404월 신학원에 입학했다.

이듬해 4월 소위 사상이 불순하다고 해서 일제 당국에 피검, 태평양전쟁으로 19428월 전국 사상범 총검거 때 전쟁에 비협조적이라는 명목으로 마산에서 체포돼, 1944년 부산지방재판소에서 3년형을 받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5819일 해방과 함께 풀려나 그의 항일 정신을 높이 평가, 동년 9월 경남 진해여자중학교 기숙사 사감으로 취임했다.

이듬해 5월 같은 기독교인이며 독립운동가인 정동규鄭桐圭(제주시 일도)와 결혼해 13녀를 두었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1985년 자전적自傳的 수기인 두 감나무 고목에 활짝 핀 무궁화라는 책을 간행, 이 책의 서문은 학교 동창생인 공덕귀孔德貴(윤보선 대통령 영부인) 여사가 써 주었다.

이 책의 자서自序에서 그는 교사 생활을 그만두고 25세 때부터 유치장으로 형무소로 전전하더니 제3차 검속에서 나는 이런 꿈을 꾸었다. 내 집 뜰 앞에 두 그루의 감나무 고목에서 무궁화 꽃이 활짝 피어 있음을 보게 된 것이다. 이게 바로 앞으로의 해방을 의미해 주신 길조의 꿈임을 깨닫고 이 놀라운 꿈을 책 제목으로 삼았다.”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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