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학문의 중요성 깨닫길…문장 하나 없는 백비를 놓았다
(14)학문의 중요성 깨닫길…문장 하나 없는 백비를 놓았다
  • 김정은 기자
  • 승인 2019.05.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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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제일고 내 교정에 위치해
조선 영조 때 세운 걸로 추정
기하학적 모양 대석이 받침대
국가 보물 제주향교와 큰 연관
체계적인 관리 필요성 제기돼
1724년 화재로 제주향교가 소실돼 가락천 동구지로 자리를 옮기면서 향교개수비가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비석은 1962년 김봉옥씨가 발견해 당시 제주제일고등학교(지금의 삼성초등학교 자리)에 옮겨 세워졌다가 고등학교 이설과 함께 현재 제주제일고등학교 자리에 자리잡았다.
1724년 화재로 제주향교가 소실돼 가락천 동구지로 자리를 옮기면서 향교개수비가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비석은 1962년 김봉옥씨가 발견해 당시 제주제일고등학교(지금의 삼성초등학교 자리)에 옮겨 세워졌다가 고등학교 이설과 함께 현재 제주제일고등학교 자리에 자리잡았다.

제주제일고등학교 내 교정에 향교개수비(鄕校改修碑)가 위치해 있다.

표지석에 따르면 향교개수비에 대해 권학비(勸學碑)라고 하고 있다.

이 비석은 언제 처음 세워졌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문헌상 유추해 볼 때 조선 성종(1469~1494) 혹은 영조(1724~1776) 때 세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문으로 정면 윗부분에 제주향교 개수○○라는 흔적만 있을 뿐 아무런 글은 없다.

일각에서는 글을 모르면 적혀 있어도 읽을 수가 없듯 학문의 중요성을 깨우칠 수 있도록 비석에 글을 새기지 않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향교개수비는 제주향교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바로 풍수해 등으로 제주향교가 여러 차례 자리를 옮겼는데, 1724년 노형동 향교개수비가 이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풍수해 등으로 여러 차례 옮긴 제주향교

제주시 용담동에 소재한 제주향교는 1392(태조 1)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해 배향(配享)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창건됐다.

원래 제주성 교동(校洞)에 세워진 뒤 5차례에 걸쳐 위치를 옮겼고, 1827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1435(세종 17) 안무사(安撫使) 최해산(崔海山)이 중건했고, 1466(세조 12) 절제사 이유의(李由義)가 중수했다.

1536(중종 31) 목사 심연원(沈連源)이 명륜당을 개축하고 향학당(鄕學堂)을 건립했으며, 1582(선조 15) 목사 김태정(金泰廷)이 가락천(嘉樂泉) 동쪽 고령전(古齡田)으로 이전했다가 1668(현종 9) 목사 이인((+))이 전에 있던 위치로 다시 이전했다.

1724(경종 4) 화재로 소실돼 목사 신유익(愼惟益)이 가락천 동구지(東舊址)로 이전했다가, 1754(영조 30) 목사 홍태두(洪泰斗)가 남문 밖 광양으로 이전했다.

1793(정조 17) 목사 조명집(曺命楫)이 대성전을 중수했고, 1827(순조 27) 목사 이행교(李行敎)가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 1851(철종 2) 이현공(李玄功)이 서재(書齋)를 건립했고, 1854년 계성사(啓聖祠)가 건립됐다.

1872(고종 9) 목사 조의순(趙義純)이 중수했다.

1946년에는 이곳에 중학교를 설립했다가 1957년 학교 확장에 따라 동무·서무를 철거하고, 1978년 대성전을 개수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계성사·좌우 협문 등이 있고, 대성전에는 5(五聖), 송조 6(宋朝六賢), 우리나라 18(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제주시 용담동에 소재한 제주향교는 1392년(태조 1년)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해 배향(配享)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창건됐다.
제주시 용담동에 소재한 제주향교는 1392년(태조 1년)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해 배향(配享)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창건됐다.

국가지정 보물 1902호로 지정

1971826제주향교 경내가 제주도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고, 199164용방록(龍榜錄, 조선시대 문과에 합격한 사람의 이름을 적은 명부)’이 제주도유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됐다.

제주향교 대성전2016613일 국가지정 보물 제1902호로 지정됐다.

지난해에는 1828년 제주향교 대성전 이전 당시 원래 모습이 최초로 확인됐다.

제주향교 대성전 동무와 서무의 정확한 위치가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동무와 서무는 대성전 좌우에 있는 건축물로 동무는 서향, 서무는 동향으로 배치돼 있다.

이곳은 공자의 제자를 비롯해 우리나라 명현 18위 등 총 112위 위패가 동서로 봉안됐던 곳이다.

제주도 세계유산본부는 지난해 4월부터 보물 제1902호인 제주향교 대성전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1828(순조 28) 이행교 제주목사에 의해 제주향교가 현 위치로 이건했을 때 모습을 확인했다.

동무와 서무의 터에서 각각 2개씩 대칭되는 문주석(門柱石)과 건물의 서쪽 경계에 해당하는 기단석렬로 출토됐다.

이로써 기존 문헌 및 사진 자료로만 추정됐던 건물의 세로 폭이 4.8m 가량임을 파악할 수 있게 됐다.

과거 제주향교의 월대(月臺)와 마당의 바닥면이 전체적으로 전(, 벽돌)이 깔렸으며, 중앙에 신도(神道)가 설치됐었던 사실도 확인됐다.

이와 함께 과거에는 동무와 서무 앞에 보도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고, 다수의 기와편(일부 막새편 포함)도 출토됐다.

최근에는 대성전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되면서 문화재청이 현상변경기준 재조정을 추진하며 주민들이 사유재산 침해를 이유로 보물 지정 철회를 요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문화재청이 기존 도지정문화재 수준으로 보존지역 건축행위 기준을 유지하면서 주민들의 사유 재산권은 보호받게 됐다.

제주향교 자리 옮길 때 향교개수비 세워진 것으로 추정

노형동 향교개수비는 1724년 화재로 제주향교가 소실돼 가락천 동구지(東舊址)로 자리를 옮기면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비석은 1962년 제주시 이도1동 고령전에서 김봉옥이 발견해 당시 제주제일고등학교(지금의 삼성초등학교 자리)에 옮겨 세웠다가 19831월 고등학교의 이설과 함께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152, 88이며 두께는 23정도로 직육면체이다.

높이 75, 앞뒤 길이 185, 옆 길이 120정도 크기의 대석이 이 비석을 받치고 있는데 동물의 모양이 아닌 기하학적 모양을 하고 있다.

비석을 발견한 김봉옥에 따르면 이 비석은 고령포(지금의 오현단 동쪽)에 향교가 있을 때 1723~1724년 동안 제주에서 목사를 지낸 신유익이 향교를 중수하면서 세웠다.

이에 따라 비석의 건립연대는 1724년으로 추정된다.

일각에서는 제주향교가 보물로 지정된 만큼 향교개수비 역시 문화유산으로 지정해 함께 체계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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