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태풍으로 도내 농가 아사 직전…정부에 구호 대책 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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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성, 함덕청맹원…사회주의 사상 전파
김두원, 무공훈장 받아
김두진, 덕풍물산·제주신보 사장 등 지내
김두은, 도교육위 의장
길성운 제주도지사가 국립목장인 송당목장에서 흰 중절모를 쓴 이승만 대통령을 안내하고 있는 모습. 송당목장은 1956년 9월 목장 건설 계획을 착수, 1957년 9월에는 공사비 3540만 환을 투입, 야간공사 끝에 10월 말 1차 완공한 후, 두 차례 육우를 도입하게 된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길성운 제주도지사가 국립목장인 송당목장에서 흰 중절모를 쓴 이승만 대통령을 안내하고 있는 모습. 송당목장은 1956년 9월 목장 건설 계획을 착수, 1957년 9월에는 공사비 3540만 환을 투입, 야간공사 끝에 10월 말 1차 완공한 후, 두 차례 육우를 도입하게 된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김두성金斗性1913(일제강점기)~?, 제주도 함덕리의 추도비 건립에 따른 항일 활동. 본관은 광산, 김정수金丁守의 아들로 산북 함덕리에서 태어났다.

1945년 조국이 광복되자 함덕리 리민 일동의 이름으로 애도 夫生鍾 宋健鎬 韓永燮 金才童이란 비석을 새로 세웠다.

비문 내용은 일제 당시의 글월을 그대로 새겨 건립했다.

김두성은 1930년 함덕청년동맹 맹원으로서 1년간에 걸쳐 소년야학으로 한글·산수 등을 가르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이해하기 쉽게 가르쳤다.

1931115일 일본 도쿄 순천당順天堂병원에서 함덕리 출신 한영섭韓永燮이 사망, 동월 19일 그 시신이 향리에 도착하자 청맹원靑盟員들은 동지장同志葬으로 할 것을 결의했다.

이때 상가에는 불평등한 사회를 타도해 무산 계급의 자유를 건설하려 한 그대는 갔지만 그대의 주의 정신은 동지마다 계승해 분투할 것이니 고이 진좌鎭座하시라는 만장輓章 등을 내걸었다.

행상하면서 동지들과 적기가赤旗歌를 합창하고 한영섭 만세를 삼창했다.

청맹원들의 의논 끝에 비문은 송건호宋健鎬가 짓고 김진희金晋熙가 글자를 새겼다.

비의 표면에는 同志 赤光 韓永燮 紀念碑라고 쓰고 이면에는 차디찬 흰 빛 밑에 눌리인 무리들아 고함쳐 싸우라고 피 흘린 동지였다.”고 썼다.

김두성은 동지 9명과 함께 체포됐고, 대구복심법원은 김두성에게 징역 16월형을, 고종건, 김일준金日準, 김진희는 각각 1년에 집행 유예 5년을 선고했다.

김두원金斗元1929(일제강점기)~1952, 육군대위로서 순국, 서귀읍 상효리<-쉐돈>에서 태어나 1951년 동부전선에서 북한군을 무찌르며 415일 건봉산乾鳳山 일대를 확보, 유도柔道로 단련된 그는 적을 생포하려던 차에 복병이 쏜 총 7발을 맞았다.

대원들이 그를 업어 귀대, 그의 생일이기도 한 1952522일 강원도 고성군 수동면 지역에서 최후를 마감했다.

김두원은 1948년 우익학생으로서 제주농업학교의 기숙사에 유숙 중이였다.

어느날 좌익 민애청民愛靑 학생이 그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마침 그가 없어서 동숙자인 장두경張斗京(한림)을 찔렀다.

장두경은 아우의 피를 수혈해 살아났다.

김두원은 19505월 제주농업중학교 6년을 졸업, 졸업 직전인 31일에 충남 아산군 온양읍 모종리 육군방위훈련학교(교장 박승훈朴承薰 대령) 4기 간부후보생으로 입교했다.

6·25남침으로 제주시 건입동의 주정酒精공장에 설치된 육군제5훈련소(소장 김병휘金炳徽 대령)에 응소했다.

김두원은 동년 927일에 경남 진해여중에 이르러 제11사단 제13대대 제3대대 제11중대 소대장으로 임관되었다.

행군으로 동년 1014일 전주시 노송동의 전주북중학교에 도착했다.

정부에서는 화랑무공훈장과 대위로 1계급 특진시켰다.

김두은金斗殷1929~2013. 제주시 도평동에서 태어나 제주농업중학교(6년제) 재학중 육지부로 전학을 가서 학업을 이었다.

김두은은 조선대학교 문리과 대학 졸업했다.

그는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장학사, 제주도핸드볼협회 부회장, 함덕종합고등학교 교장을 거쳐 제주도교육위원회에 당선돼 의장을 역임했다.

이후 그는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김두진金斗珍1912(일제강점기)~1985, 제주농업학교 학생의 제1차 항일활동. 국회의원. 본관 김해, 김남룡金南龍의 아들, 한경면 두모리<두미>에서 태어나 193137일 제주농업학교를 졸업했다.

김두진은 졸업 직후 동기생들과 함께 평소 한국 학생에게 민족적 차별을 일삼던 일본인 교장 스기사키<杉崎勝藏>의 배척 운동을 전개했다.

이 일로 일경에 체포된 그는 1932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 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김두진은 조국이 광복되고 정부가 수립되자 농림부 섬유계장 등 공직에 재임했으며 덕풍물산 사장, 삼양기업 사장 등을 역임, 또 한국면업綿業협회 전무를 역임하고 고문으로 있었다.

또 순국충령 봉안회 이사로서 항일 운동으로 순국한 애국자의 넋을 위로하는 사업에 참여했다.

김두진은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시에 북제주군 을구乙區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6023표로 차점인 홍문중洪文中(35·어도·무소속 5718)을 눌러 당선됐다.

그는 여당인 자유당에 입당, 국회 절량농가 특별 조사위원으로 활동했다.

19569월 제주도를 덮친 태풍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어 제주시 1400여 세대 6500여 명과 조천면 중산간 마을에 50%의 절량농가가 발생했는데, 국회의원 김두진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앞장섰다.

필요한 구호 양곡이 45200여 석인데 도 당국은 긴급히 중앙에 요청, 밀가루 3200포를 배정 받았고 천주교회에서 옥수수 500포를 지원받았다.

도의회에서도 국회에 구호미 추가 배정을 요청하고 국회의원 김두진은 대정부 질의에서 제주의 절량 실태를 밝히고 정부의 구호 대책을 따졌다.

이에 국회에서도 제주도의 식량난 현지 조사단을 구성, 1957316일에 농림분과 위원장 조병문 의원을 단장으로 13명이 내도해 조천, 성산, 표선, 남원, 서귀포 지역을 현지 확인했다.

농림분과 위원들과 농림부 양정국장 등 13명의 조사단은 제주 지역의 전량 사태를 낱낱이 조사한 후 귀경했다.

319일 농림부장관에게 제주도 전체 농가의 주민 214788명 가운데 18만명이 절량絶糧으로 아사 직전에 있어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해서는 4월부터 6월 중순까지 대여곡 보리 18000섬과 옥수수 18000포대, 밀가루 1000포대를 추가로 특별 배정했으나 식량난은 크게 호전되지 못하다가 보리 수확기에 이르러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었다.

1960311일 제주신보 사장 김석호金錫祜가 신병이 위독해 사표를 제출하자 후임으로 국회의원 김두진이 주주 총회에서 신임 사장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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