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빛 가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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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언, 시인·수필가

오월이 초록빛으로 낭창거린다. 뭇 생명이 네가 있어 내가 있노라고 반갑게 껴안는다. 황홀하다.

그제는 코앞의 어버이날을 의식한 듯 막내아들이 나들이를 제안했다. 바쁜 시간을 쪼개며 함께하겠다는 마음이 고마웠다. 아내에게 물영아리오름을 오르자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고향에 드나들며 수없이 눈으로 만나지만, 그 오름 오른 적 없는 아내의 세월이 야속하다.

먼저 부모님 산소에 들르기로 했다. 올봄에 두 번 다녀왔지만, 부재의 자리에서 뵙는 마음은 늘 회한의 통증이다. 널따란 친족 공동묘지에 도착하니 고사리 꺾는 아낙 몇이 눈에 띈다. 아뿔싸, 선조들 봉분이며 주위에는 온통 개민들레가 노란 꽃을 피웠다. 아름다운 화단이다. 얼마 후 벌초하려면 손이 많이 가겠지만, 생명을 보듬는 자연의 마음인 것을 어찌하랴.

어버이 산소에 큰절을 올린다. 평생 땅 일궈 자식들을 키우신 노고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 온다. 어머니는 지난 1월 선친 옆에 잠드셨다. 20여 년 만에 두 분은 무슨 말씀을 나누실까. ‘높은 디 올랑 보민’, 삶의 화두를 던지시고 유언인 양 미소를 지으시던 어머니의 마음을 어이 다 짚으리.

일전에 카톡을 건너온 <어머니의 편지>란 글이 눈가를 젖게 했다. 우리 시대의 어머니는 별반 다름없는 인생을 사셨으리라. 자녀를 사랑으로 낳아 키웠으며, 밥 지어 먹이는 걸 소임으로 알았던 어머니는 ‘어머니’시다. 수식어 없이도 빛나는 별이다. 정성껏 살아라. 지혜로운 맺음이 종소리로 울린다.

목재 계단을 밟으며 물영아리오름을 오른다. 조금 올라도 숨이 차다. 계단 양옆에서 줄지어 피어난 새우란이 힘내라 응원한다. 맨 뒤에서 그림자처럼 따르며 안전에 마음 쓰는 아들이 듬직하다. 거북이걸음으로 올라가다 달팽이 걸음으로 쫓아오는 아내에게 한마디 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일지 모르니 힘을 내세요.” 즉시 아내가 이어받는다. “근력을 키워서 몇 번 더 와야지요.” 누렇게 시든 말을 할 때면 주저 없이 푸른색으로 덧칠한다.

정상에 올라 한숨 돌리고 굼부리를 향해 내려갔다. 간간이 사진작가들을 만난다. 여럿이 카메라 앵글을 맞추는 곳으로 눈길을 보낸다. 이름 모를 나무에 피어난 쪼그만 꽃이 웃고 있다. 화려함이 없어 매혹적인가. 아는 만큼 보이는 거라고 진지한 표정들이 인상적이다.

마지막 계단 옆으로 난 데크에 서서 황량한 풍경에 가슴 엔다. 찰랑대던 예전의 풍부한 물은 어디 가고, 누렇게 마른 수초들만 주검처럼 서 있을까. 한복판에는 고작 서너 바가지의 물이 갈증을 호소하고 있다. 람사르습지에서 물이 물을 달라는 아우성은 뉘 탓일까.

주변의 나무들은 푸른 잎으로 생기가 넘친다. 그간 분화구를 젖줄로 허기를 모르고 자란 듯하다. 자연은 만물의 어머니여서 수목을 키우고 사람의 시름을 잦게 한다.

되돌아선다. 길을 잘못 들면 오를 때도 내릴 때도 꽃을 못 보는 법, 내 생의 길섶엔 무명초 한둘이라도 피어날까. 도란거리며 하산하는 걸음이 가볍다. 아들이 예약한 맛집을 향하며 자동차도 신난다.

초록빛 가슴으로 세상을 안아야지. 내가 웃어야 거울도 웃는다지 않는가. 햇볕으로 등 데우며 행복해야겠다.

빛과 색과 소리로 난장인 오월, 사랑한다는 말도 하며 칭찬 받은 고래처럼 살아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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