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발생 후 무장대와 국방경비대가 평화협정 맺기로 했으나 실패
지난 生의 기억 지우고 푸릇푸릇한 오월의 얼굴로 다시 태어나기를···
청보리 물결을 건너고 나니 우리는 어느 새 녹음(綠陰) 앞에 서 있다. 수필가 피천득 선생은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고 썼다. 연두에서 초록으로 짙어진 물감이 막 오월을 채색할 쯤이다. 바람난장 오월의 문을 연 곳은 서쪽 끝 대정읍 구억리. 지금은 흔적조차 아련한 옛 구억국민학교다.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목숨도 아끼지 않겠소/험한 산도 나는 괜찮소/바다 끝이라도 나는 괜찮소’, <사명>의 절연한 의지가 리코더를 타고 천상으로 퍼진다. 저 작은 구멍이 넘나드는 세계에 블랙홀처럼 빨려든다. 우리도 모르는 세계로 데려다 놓는 저 화음의 근성. 그래, 그래, 우린 잊지 않았어. 그날의 피맺힌 恨의 기억들을.
1948년 4·3사건이 터진 지 25일 만인 4월28일.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무장대 총책 김달삼과 김익렬 국방경비대 9연대장은 이곳 서귀포시 구억리 국억국민학교에서 ‘평화협상’을 맺기로 한다. 72시간 내 전투 완전 중지, 점차적인 무장대 무장 해제 등의 조항이었다. 그러나 사흘 뒤 5월 1일 오라리 연미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일명 ‘오라리 방화사건’이 터진다. 마치 협상이 결렬되기라도 바란 것처럼. 운명은 잔인하게도 불행의 편이었다.
-오승철, ‘3일 평화-4·3 두 청년 이야기’ 전문
지난 해(2018년) 문화패 바람난장은 이곳에 70년 만에 표석을 세웠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공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싶었다. 동백나무를 심고 표석에 글을 새겼다.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몫인 지도 모른다. 세상은 기억의 원자로 지구를 돌리고 돌아가는 것인지도.
피맺힌 영혼은 어디서 숨죽여 울고 있을까. 구석구석 비명(悲鳴)한 혼을 불러들인다. 양창연 무용가의 살풀이. 하얀 넋을 위로하며 부디 좋은 곳에서 지난 生의 기억을 지우고 푸릇푸릇한 오월의 얼굴로 다시 태어나길 기원한다.
철쭉꽃 핀 동산에서는 사라졌던 조무래기 아이들이 ‘꼼짝 꼼짝 고사리 꼼짝’을 노래하며 푸르게 오월을 건너고 있다.
사회=정민자 무용=양창연 플루트=김수연 리코더=오현석 트럼펫=홍석철 시낭송=김정희와 시놀이 사진=허영숙 영상=김성수·홍예 음향=채현철 글=김효선 후원=제주특별자치도·제주신보·㈔제주메세나협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