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오신 날 아침에 이 글을 쓴다.
나는 불교 신자는 아니다. 그러나 독실한 불자인 두 친구가 곁에 있다. 덕택에 전국의 명승고찰을 찾아 두 친구는 수행하고 나는 명상에 잠기며 마음을 가다듬는 기회를 자주 갖는다.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나의 큰 스승인 부처님! 이 세상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기독교에 다녔고 기본 생각부터 늘 예수님이 따라 다녔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그 말씀에 따르면서도 ‘큰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주님께서 다 용서해 주신다.’는 말이 어렸을 때는 매우 기뻤으나 나이 들어갈수록 ‘과연 그럴까’라는 생각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느 날 친구와 대화중에 ‘부처님은 죄(업보)를 용서해 주시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면 뭐 하러 절에 가는가? 자신이 지은 업보를 참회와 고행으로 가볍게 만들기 위해서란다. 그리고 덕행을 쌓을수록 업보가 더 가벼워지는 것이란다.
지난 4월 말에 변산반도 내변산 능가산에 있는 ‘월명암’에 2박 3일간 다녀왔다. 유명한 직소폭포에서 두 시간 남짓 가파른 길을 올라가야 하는 명승고찰이었다. 물론 친구 둘과 함께. 거기서 보광스님을 만난 것은 대둔산 태고사에서 정안 큰스님을 만난 것과 더불어 나에겐 큰 은총이었다. 정안스님께 받은 맑은 미소와 세뱃돈 3천원은 늘 가슴에 담고 다닌다.
‘저는 아무리 기도하고 참선해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어요. 스님들의 수행을 도와주고 절에서 힘들게 일하는 것이 저에겐 꼭 맞는 것 같아요’라고 웃으며 채마밭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모습이 바로 부처님 모습이었다. 나는 정안스님에게서 깨달음이 무엇인가를 보았다. 성철 큰 스님이나 김수환 추기경님의 공통점은 맑은 웃음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전시 중인 ‘영월 창령사 터 오백나한전’에서 멍하니 바라보며 취한 것도 바로 깨달은 자의 ‘웃음’이었다.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 이라고 한 이백의 ‘산중문답’과 ‘왜 사냐 건 웃지요’ 라고 노래한 김상용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를 음미한다. 존경하는 친구 목민(牧民)선생이 부채에 담아 써준 ‘심자한 (心自閑)’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돌아올 여름도 아무 걱정 없을 것 같아 마음이 절로 한가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