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일제 탄압에 맞서 의병 일으켜…대정성 동문 밖서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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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훈, 민주주의 민족전선 결성 앞장
김두희, 제주대 총장 등 역임
김두희(여), 美 시카고대 교수 등 지내
김득수, 추자 어민 항일 활동
김만석, 제주의병항쟁 의병장
김만선, 오사카 전협 금속노조 활동
1977년 제주시 사라봉 공원 모충사에 건립된 ‘의병항쟁기념탑’의 모습. 이 탑은 1909년 당시 고사훈, 김만석 등 제주 의병들의 의로운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3단계 기층 위에 사람 인(人)자 모양의 세 줄기 기둥이 20m 높이로 솟구쳐 있고, 그 사이에 세 줄기의 보조 기둥이 어우러져 있다.
1977년 제주시 사라봉 공원 모충사에 건립된 ‘의병항쟁기념탑’의 모습. 이 탑은 1909년 당시 고사훈, 김만석 등 제주 의병들의 의로운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3단계 기층 위에 사람 인(人)자 모양의 세 줄기 기둥이 20m 높이로 솟구쳐 있고, 그 사이에 세 줄기의 보조 기둥이 어우러져 있다.

김두훈金斗壎1902(광무6)~1948(분단시대), 제주도 민전民戰 간부. 본관은 김해, 한경면 신창리<-두미> 김영봉金英鳳의 차남으로 태어나 일찍이 제주 성안으로 옮겨 칠성로七星路에서 살았다.

당시 제주도총무국장 김두현金斗鉉의 아우이다.

1947217일에 제28주년을 맞이하는 3·1절 기념일을 성대히 거행하기 위해 제주도3·1투쟁기념 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각계 인사 다수가 칠성통 김두훈 댁에 회집해 총무부, 재정부, 선전선동부 등 부서를 설치하고 위원 28명을 선정했다.

1947223일 제주도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 의장단에 안세훈安世勳, 이일선李一鮮, 현경호玄景昊 등을, 또 부의장단에는 김택수金澤銖, 김상훈金相勳, 김용해金容海, 오창흔吳昶昕 등을 선출했다.

다음날 민전 상임위원회를 개최, 각 부서와 임원을 뽑았는 데 김두훈은 재무부장이 되었다.

3·1절 시위 도중 경찰 발포로 도민 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써 총파업에 돌입한 후 김두훈과 고창무 외 수 명이 검거돼 경찰의 조사를 받았으며 제주경찰감찰청 특별수사과에서는 각 파업단체 책임자를 호출해 조사했다.

그 후 19484·3사건이 일어났고, 동년 1228일 김두훈은 문봉택, 채세병蔡世秉(33, 변호사) 등 유지 13명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김두희金斗熙1927(일제강점기)~2011, 제주대학교 총장. 교수, 본관은 광산. 아호는 동산東山. 구좌읍 한동리<-> 태생. 주소 제주시 연동蓮洞<->.

김두희는 고려대와 고려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제주대학 교수, 대학총장, 미국 디킨슨법대 명예법학박사, 제주대 교무과장·법학과장·법문학부장·지역개발학부장·사회과학대학장·사회발전연구소장, 고려대 법학과 교환교수, 제주도교육위원회 교육위원, 제주도교육회장, 대한교육연합회 상무이사, 새한신문 운영위원, 제주도정 평가교수, 한미 펜실바니아주 친선협회 회원 등을 역임했다.

필자의 변 : 1988년 나의 인사는 문교부에 의해 발령됐고 총장실로 사령장을 받으러 학장을 따라갔다. 총장실은 시위학생들로 점거되고 학내는 어수선했다. 그래서 창고 같은 집무실에서 김두희金斗熙 총장으로부터 사령장을 받았고, 이어 부임한 김형옥金瀅玉(이호) 총장 밑에서 4년을 재임했다. 김두희 총장은 나의 종친이고, 김형옥 총장은 제주농중 3년 선배여서 이 분들의 많은 도움으로 나의 뜻을 이룰 수 있었다.

김두희金斗熙()물리학자, 대학교수, 대학장 신상준申相俊(한림읍 귀덕리)의 부인.

김두희는 1952년 서울문리대 물리학과 졸업, 1956년 마이애미대학교(플로리다) 물리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1957~1964년 미시카고대·미시간주립대 교수, 1965~1980년 고려대·경희대·서울대·이화여대 강사, 1967~1971년 한국원자력연구소 연구원·숙명여대 이과대理科大 물리학과 교수를 지냈다.

또한 1960년 시카고대학 대학원 수료, 1964년 미시간주립대학교 대학원 수료했고, 1975년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물리학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득수金得守1889(고종29)~?, 일본 어민들의 어장 침탈에 따른 항일 활동.

추자면 영흥리<-구미> 태생이다. 김득수는 193278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일본 어부들이 유자망流刺網 어업으로 연안 어족이 고갈되자 추자 어민들은 생존권 문제를 들어 일본 어민에게 항의했고, 이는 항일 활동으로 발전됐다.

김만석金萬石1885(고종22)~1909(융희3), 한말 제주의 의병장.

일명 김광일金光一, 김선일金先一로 표기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제주 의병들은 결전決戰 거사일을 190933일로, 주성州城을 점령하기로 정해 격문과 통고문을 225일 정오를 기해 사발통문沙鉢通文으로 돌려, 병력 동원 차 고사훈이 대정군으로 출발했다.

고사훈, 조인관, 김만석, 김재돌, 양남석 등은 당일 영락리에 이르러 의병 20여 명을 가담시키고 신평·안성·광청 등지에서 장정 300여 명을 가담시켰다.

순사巡査 강원호康源鎬는 조인관을 체포하려 했으나 뿌리쳐 도주했다.

김만석은 34일 고사훈과 더불어 포승을 끊고 간수와 순사를 쓰러뜨려 탈주하던 중 애석하게도 한국인 출신 친일 순사의 발포에 의해 대정성大靜城 동문 밖에서 순국했다.

가족이 없던 김만석은 처형장에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이후 안성리 주민들에 의해 현 위치인 속칭 -동산에 가매장됐다.

정부에서는 19958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제주의병항쟁 의병장 김만석의 묘.
제주의병항쟁 의병장 김만석의 묘.

김만선金萬善1905(일제강점기)~?, 일본에서 항일 활동. 구좌읍 하도리<별방>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1932년 방직 공장 노동 운동의 배후인물로 검거돼 19364월에 기소, 동년 1026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19344월 그는 이영복李英福(하도), 김경숙金京淑(하도), 현상호玄尙好(하도), 현호진玄好珍(성산) 등과 함께 나가야또모노까이<長屋友之會>’(셋방살이하는 사람들의 모임)를 조직해 동포의 집세 문제·전기 요금·수도 요금 등의 인하와 면세 투쟁을 벌여 재일 한국인의 혁명의식 앙양에 헌신했다.

또한 그는 전협全協 금속노조 오사카지부 서西지구 책임자 홍원표洪元杓(귀덕)에 의해 19355월에 이영복, 김경숙과 함께 그 조직으로 들어가 활동을 하던 중 동년 12월에 검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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