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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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2007년 프랑스의 저명한 언론인·철학자 앙드레 고르가 죽음을 앞둔 아내와 동반 자살했다. 고르는 84세, 아내는 83세. 침대 밑에 놓인 편지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화장한 재를 함께 가꾼 집 마당에 뿌려 주시오.’

노부부의 자살 소식은 온 세계로 퍼졌고, 수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20년도 더, 불치인 근육수축병에 걸린 아내를 위해 살아오던 고르가, 아내의 죽음이 다가오자 극약을 주사해 함께 숨을 거뒀다.

아내가 병을 앓자 신문사를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가 간병에 매달렸다는 고르. 아내의 죽음이 목전인 걸 알아, 병석의 아내에게 들려주려 그들 ‘사랑 이야기’를 글로 썼다 한다. “우리가 함께한 역사를 돌이켜보며 나는 많이 울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우리의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글을 대중을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아내만을 위해 썼습니다.”

하지만 그의 편지가 아내에게만 들려 줄 수가 없어 책으로 출판되자 프랑스와 독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당신은 곧 여든 두 살이 됩니다. 키는 예전보다 6㎝나 줄었고, 몸무게는 겨우 45㎏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됐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편지의 마지막엔 그가 아내와 함께 죽을 것을 결심한 듯한 구절이 들어 있어 더욱 가슴 엔다.

“밤이 되면, 가끔 텅 빈 길에서, 황량한 풍경 속에서, 관을 따라 걷고 있는 한 남자의 실루엣을 봅니다. 내가 그 남자입니다. 관 속에 누워 떠나는 것은 당신입니다. 당신을 화장하는 곳에 나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의 재가 든 납골함을 받아들지 않을 겁니다. 캐슬린 페리어의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세상은 텅 비었고 나는 더 살지 않으려네….」”

문득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이라던 옛 주례사가 떠오른다. 표현이 진부함을 넘어 그 말의 진정성에서, 서양 철학자 내외의 아름다운 사랑에 상당히 계합하리라. 머리 허옇게 함께 살았다면 그 이상 아름다운 사랑이 없지 않을까.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만해 한용운의 〈사랑하는 까닭〉을 더 얹게 된다. 시는 그에 그치지 않고, ‘나의 미소만 아니라 눈물도, 나의 건강만 아니라 주검도 사랑하는 까닭’으로 흐른다.

남들은 좋은 것만 사랑하는데, 좋지 않은 내 백발과 눈물과 주검을 사랑하는 까닭에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고백이다. 사랑, 지고지순한 사랑이야말로 더할 수 없는 고귀한 가치다. 소아(小我)의 이기적 애착에서부터 세계 전체를 동일시해 아끼고 보살피는 영성적·무아적 사랑에 이르러 사랑의 진폭은 크고 넓다.

만해의 사랑은 색다르다. 진정한 사랑은 홍안은 물론 백발도 사랑하는 것이며, 한 인간의 미소도 눈물도 주검도 사랑하는 것이라 한다. 존재의 모든 걸 사랑할 때라야 비로소 참다운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랑은 빛과 그림자가 하나임을 깨닫는, 존재에 대한 절대적 긍정에서 나온다.

고르 부부 같은, 만해 시에서처럼 그런 순일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때, 세상은 더한층 본래의 순수로 회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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