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4·3 생존 수형인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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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수, 리쓰메이칸대학 국제관계학부 특임교수/논설위원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서 보도된 것처럼 지난 1월 제주 4·3 당시 군법회의 수형인 18명의 재심청구에 대해 제주지방법원은 사실상의 무죄판결이라 할 수 있는 항소기각의 판결을 내렸다. 검찰이 항소를 포기하면서 일심법원의 판결이 확정되고 재심청구에 나선 분들은 70년 만에 억울한 ‘전과자’의 오명을 벗게 된 셈이다.

김대중 정부 시기에 발굴된 ‘수형인명부’에 의해 1948년 12월과 1949년 6월∼7월의 두 차례에 걸쳐 계엄령하에서의 ‘내란죄’나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2530명이 유죄판결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계엄령’이나 ‘국방경비법’은 법적 근거가 희박했고 군법회의 자체도 정상적인 절차를 무시한 ‘허구의 재판’(김종민 ‘제주 4·3 군법회의 재심사건’[(SLOW NEWS])이었다고 한다.

4·3생존수형인의 재심 청구를 주도해 온 4·3도민연대 양동윤 대표에 의하면 승소한 18명이 국가를 상대로 형사보상청구 절차에 나선 한편 오는 6월에는 제2차로 4·3 생존 수형인(6명)의 재심청구를 준비하고 있다. 그중 한 분이 일본 도쿄에서 딸과 함께 거주한다는 사실을 제주시에 사시는 아들 신고에 의해 밝혀졌다.

필자는 양동윤 대표의 요청을 받아 딸과 연락을 취해 지난 5월 초에 이 생존 수형인 댁을 찾아갔다. 1926년생인 S씨는 4·3당시 제주시에서 연행되면서 징역 1년 형으로 목포형무소에 수감됐고 석방 후 해병대에 입대해 인천상륙작전 등에 참전했으며, 제대 후에는 서울에서 버스 회사에서 일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재심에 관한 사정설명이나 의사 확인 이외에도 짧은 시간이나마 이야기를 나눴는데, S씨는 4·3 당시 연행돼 수감된 일보다 인천상륙작전 등에서 많은 동료를 잃었던 체험들을 주로 언급했다.

S씨의 존재는 다시 한번 4·3과 재일동포 사회와의 관련을 상기시킨다. 4·3당시 화를 피해서 많은 제주도민이 일본에 건너간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현행 4·3특별법이 ‘대한민국재외공관’에 4·3희생자 신고처를 설치한다는 조항(제10조)을 담은 것도 그러한 제주 4·3과 일본과의 관계를 반영한 것이다.

그동안 일본에 거주하는 4·3 희생자 유족 40여 명이 희생자신고에 나서 인정된 희생자 수는 약 80명인데 여기에는 수형인은 보이지 않는다.

4·3과 재일 동포와의 관계가 거론될 때 주로 1947년∼1949년의 일본행 밀항자(1만 명 이상이 GHQ의 감시망을 뚫고 밀항에 성공했던 것으로 추정됨)가 언급됐지만, 사실은 밀항의 흐름은 1950년대에서 1960년대, 심지어는 한일수교(1965년) 이후의 1970년대에도 계속 이어진다.

1959년의 신문 보도(‘아사히신문’ 12월 15일에 의하면 “한국으로부터 일본에 도망해 오는 사람은 한 달 평균 500~600명이나 된다”는 것이다. 여러 자료에 의하면 1960년대까지만 해도 매년 몇 천 명 규모, 1970년대에도 해마다 몇 백 명 규모의 제주인이 밀항에 성공해서 일본에 뿌리를 내린 것으로 추정된다.

S씨도 이렇듯 1950년대 이후에 일본으로 건너간 수많은 제주인의 한 사람이었으며, 4·3수형인이 출옥 후에 한국 사회에서 겪어야 했던 심한 차별이나 편견을 생각하면 S씨 말고도 일본에 건너간 수형인이 적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S씨의 재심청구가 일본에서의 파묻힌 4·3희생자나 유족을 찾아내고 제주 4·3의 또 하나의 진실을 밝혀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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