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국가 위기 때마다 말을 바쳐…후손 대대로 감목관 세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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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유, 日 니시아라이병원 개원
김만일, 종1품 숭정대부 제수 받아
김만제, 제주농업학교 항일 활동
김맹옥, 한시 작가·시조창 명인
김면수, 정의군 표선·남원 분할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에 있는 헌마공신 김만일의 묘역. 그의 묘는 낮은 구릉상 대지에 부모 묘와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김만일 묘역의 봉분, 비석, 혼유석, 문인석 등은 제주특별자치도 지정문화재 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됐다. 사진=서귀포시 제공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에 있는 헌마공신 김만일의 묘역. 그의 묘는 낮은 구릉상 대지에 부모 묘와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김만일 묘역의 봉분, 비석, 혼유석, 문인석 등은 제주특별자치도 지정문화재 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됐다. 사진=서귀포시 제공

김만유金萬有1914(일제강점기)~?, 재일교포 의사. 만주의 만보산萬寶山 농민 학살에 저항하는 격문을 살포한 항일학생 활동. 본관 김해, 대정읍 상모리<-모실개>에서 김여홍金麗弘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만유는 상경, 중앙기독청년회 소속 학교에서 배우다가 1931년 보성고등보통학교 제4학년으로 편입학했다.

이후 김만유는 도쿄의과대학 전신인 일본의과전문학교로 진학했다.

그는 19435월 도쿄<東京> 아라가와구<荒川區>에 니시아라이<西新井> 병원을 개원, 일본의 패전이 짙어갈 19453월에 미군은 일본 도쿄을 공습했고 동년 39일 김만유의 병원은 잿더미로 변했다.

동년 8월 조국은 해방돼 19451015일 도쿄 히비야<日比谷> 공회당에서 400여 명의 한국 교포가 모여 재일본在日本 조선인연맹 결성대회를 개최된 바 제주 사람으로 김민화金玟華(조천)가 부위원장이 되고 김만유는 무임소 임원으로 뽑혔다.

19461010일 해방신문을 발간, 사장에 김천해金天海(울산), 김만유는 동 논설위원이 되어 친일파 민족반역자 숙청을 신랄하게 주장했다.

그는 19766월 자본금 2억엔을 기부해 김만유과학진흥회라는 장학 재단을 만들어 이사장이 되었다.

김만일金萬鎰1550(명종5)~1632(인조10), 헌마獻馬공신. 자는 중림重臨, 본관 경주, 정의현 남원읍 의귀리<-> 사람이다.

본시 집안이 부유해 노복이 수 백 명이나 되고 소유한 말이 산과 들에 가득했다.

그는 지금의 남원읍 의귀리<->에서 수망리<무랏>에 이르는 광대한 규모의 말 목장을 운영했으며 말의 수가 1만여 필이 넘었다고 전해진다.

전쟁 때마다 수차례에 걸쳐 1000여 필의 말을 진상한 공로로 1628(인조6)에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를 제수 받았다.

이후 그의 아들 김대길金大吉을 시작으로 후손이 대대로 산마감목관으로 임명됐는데 그의 가계에서 무려 218년 동안 83명의 산마감독관이 배출됐다.

산마장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국영목장 외의 목장을 말하며 산장山場, 산둔장山屯場, 산목山牧 등이라 불렀다.

김만일이 국가에 말을 바치기 시작하자 10소장 내의 그의 목장을 기반으로 동서별목장東西別牧場을 설치했다.

그는 일찍이 국축國畜이 결손 되어가는 것을 개탄, 임진왜란을 비롯해 1620(광해군 12), 1627(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 등 국난의 위기마다 말을 바쳤다. 1686(선조12) 500필을 조정에 헌납했다.

이를 동별목장·서별목장西別牧場이라 해 이곳에서 양축하니 국둔 목장이 되었다. 조정에 올려 보낸 군마는 모두 1300여 마리에 이른다.

이런 공으로 지중추知中樞 오위도총감五衛都摠監(2)을 상으로 받았다.

김만일의 아들 김대길金大吉 및 사손 김여金礪200여 필의 말을 헌납하니 1658(효종9) 제주목사 이회李禬가 장계로 요청, 김대길에게 감목관(6) 직을 주어 그 자손에게 대대로 세습하도록 했다.

김만일의 후손들이 모여 조상의 은덕으로 감목관직을 뽑아왔다.

김대명金大鳴도 보성군수였는데 그는 김대길의 형이다.

김반金磻(김대길의 장남) 때부터 누대에 걸쳐 3년마다 200필씩 헌마를 했다.

김반의 아들 김우천金羽遷도 본도의 감진監賑으로 임명돼 비축곡 140섬을 진제賑濟에 보충하니 부호군으로 가자 되고 우천의 아들 김남헌金南獻은 전라도 장흥군의 벽사찰방碧沙察訪이 되었다.

1895(고종32) 과제가 개혁되면서 산마감목관山馬監牧官과 명월만호·심약審藥·검률檢律·왜학倭學·역학譯學 등의 관직을 폐지할 때까지 이어왔다.

김만제金萬濟1920(일제강점기)~?, 제주농업학교 학생의 제2차 항일활동.

한림읍 명월리에서 김중현의 아들로 태어나 1931810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유죄 판결이 있자 항소해 동년 10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4년 선고받았다.

김맹옥金孟玉1913(일제강점기)~1989, 한시 작가 및 시조창 명인名人, 호는 귤정橘井. 영주음사瀛洲吟社 회원. 본관은 나주, 애월읍 납읍리<과납> 김계형金桂瀅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7년 애월공립보통학교 졸업, 마을 훈장 백암栢菴 진병식秦柄植의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했다.

 

귤정橘井 김맹옥이 한남시우회 회원 농은農隱 공의 장손에게 써준 십곡十曲 병풍서.
귤정橘井 김맹옥이 한남시우회 회원 농은農隱 공의 장손에게 써준 십곡十曲 병풍서.

김면수金冕秀1855(철종6)~?, 문신. 감리서監理署 서기, 정의군수, 기독교 장로. 본관은 풍산, 정의군수.

김면수는 구한 말 최후의 정의군수로서 일제의 침략으로 그 직을 떠났다.

그는 경북 안동군 풍북면 오미동에서 태어나 1894년 부산항 감리서監理署 서기로 출발, 동래부 관찰사·동래감리서 주사·창원감리서 주사를 거쳐 1901년 무안감리서 주사를 역임했다.

1910219일 정의군수 겸임 정의공립보통학교장으로 발령, 1910(융희4) 향사당鄕社堂을 훼철, 그 재와材瓦로 정의객사旌義客舍를 수리했다.

그는 1911418일에 정의군 중면中面을 동중면東中面(현 표선면)과 서중면西中面(현 남원읍)으로, 행정구역을 분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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