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봉우리가 붓처럼 생겨…장원급제 기원 장소로 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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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지리 문필봉·오라동 족감석
제주시 애월읍 곽지리에 있는 문필봉은 곽금2경 ‘문필지봉’으로 불리고 있다. 문필봉은 옛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갈 때 장원급제를 기원하는 장소로 이용됐다.
제주시 애월읍 곽지리에 있는 문필봉은 곽금2경 ‘문필지봉’으로 불리고 있다. 문필봉은 옛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갈 때 장원급제를 기원하는 장소로 이용됐다.

제주지역은 설문대할망에 대한 전설이 곳곳에 녹아내렸다.

설문대할망에 관한 가장 오랜 문헌 기록은 조선 숙종 때 제주목사였던 이원조가 펴낸 탐라지.

설문대할망은 제주도를 창조한 여신으로, 거인으로 설명두할망또는 세명뒤할망이라 불렸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설화는 지역의 특수한 명소와 만나 관광 콘텐츠로도 부각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못한 곳들이 훨씬 더 많다.

제주시 애월읍 곽지리 소재한 문필봉과 제주시 도남동에 위치한 족감석이 그렇다.

곽지리 문필봉

제주시 애월읍 곽지리에 위치한 문필봉은 곽금2문필지봉으로 불리고 있다.

애월읍 곽지리 경계에는 세 개의 돌무더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는 곳이 있다.

이 바위 더미는 설문대할망이 솥을 앉히고 음식을 만들던 장소라고 해서 솥바리라고 부른다.

이 솥바리 중 지금은 한곳만 남아있으며 봉우리가 꼭 붓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곽지에서는 예부터 문필봉이라고 불렀다.

오랜 기간 풍우로 인해 돌들이 무너지기 시작해 중간 일부와 봉우리가 떨어져 방치돼 있었는데 주민들은 꼭대기 부분을 누가 부러뜨려 버렸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200369일 이 훼손된 부분을 곽지리에서 복원하기로 결정해 628일 기공, 그해 1010일 복원됐다.

문필봉은 옛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갈 때 장원급제를 기원하는 장소로 이용됐다.

또 수험생들이 이곳에서 기도를 올리며 합격을 바라기도 했다.

특히 곽지리는 예부터 선비고을로 잘 알려져 있고 문인들도 많이 배출됐다고 알려진다.

대대손손 이 지역에서는 예부터 이 문필봉을 잘 보존하라고 했고, 보존이 잘 될수록 선비와 인재는 더 많이 배출된다고 믿어왔다.

설문대할망이 음식을 만들던 장소라는 설 외에도 또 다른 전설이 전해진다.

150여 년 전 한 스님이 곽지리에 시주를 받으러 왔다. 하지만 그해 마을이 가뭄 등으로 가난해 스님에게 시주를 넉넉히 주지 못했다.

여기에 화가 난 스님은 마을 사람들과 말다툼이 벌어졌다.

스님은 자신을 업신여긴다며 화를 냈고 마을 사람들은 그래도 없는 형편에 시주를 할 만큼 했다고 다퉜다.

분이 풀리지 않았던 스님은 문필봉에 있는 꼭대기 돌을 허물어야 이 마을에 문인이 나온다고 거짓말을 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문필봉의 꼭대기를 허물어 버렸다.

그 후 마을에서는 문인들이 배출되지 못했다고 한다.

꼭대기를 복원하면 문인들이 많이 배출될 것으로 믿고 2003년 복원한 것으로 알려진다.

곽지리에서만큼은 문필봉이 잘 알려졌지만 아직 많은 이들이 이곳을 보고도 어떤 장소인지 모르고 지나친다고 한다.

한 마을 주민은 마을 차원에서 마을의 유래, 주변에 역사적인 곳, 오름 등 자연환경과 연계해 많은 이들을 이끌어올 수 있지만 자연 유산인 만큼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환경적 요소로 훼손될 위험이 높다전설과 함께 여러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기 때문에 고증을 통해 이곳을 문화유적으로 지정하면 체계적 관리와 보존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제주시 도남동에 있는 오라동 족감석. 200여 t 가량의 큰 둥근 암석으로 마을주민들에게는 ‘설문대할망 족두리 모자’로 불려지고 있다.
제주시 도남동에 있는 오라동 족감석. 200여 t 가량의 큰 둥근 암석으로 마을주민들에게는 ‘설문대할망 족두리 모자’로 불려지고 있다.

오라동 족감석

제주시 도남동에 위치한 오라동 족감석.

이 바위는 원래 오라동에 위치해 있다가 2007916나리 태풍의 영향으로 약 50m 떨어진 곳으로 밀려나가면서 행정구역상 도남동으로 옮겨진 것.

KBS제주 방송국 뒤쪽 고지교 인근에 오라 올레길이 나있는데 이곳에 설문대 할망 족두리 설화가 적혀 있는 바위석이 위치해 있다.

그 밑으로는 오라동 족감석이라고 불리는 큰 바윗덩어리가 우뚝 서있다.

바위면에는 慶州李元欽惠譜表(경주이원흠혜보표)’라는 글씨와 작은 글씨로 戊午 族感石(무오 족감석)’이라는 새겨져 있다.

200t가량의 큰 둥근 암석은 마을 주민들에게는 설문대할망 족두리 모자로 불려지고 있다.

오라동 주민들은 예부터 이 고지교 하천이 넘쳐도 이 돌 만큼은 휩쓸리지 않아 마을을 지켜주는 상징적인 돌로 여기고 있다.

족감석에 얽힌 전설도 재밌다.

설문대할망은 한라산을 베개 삼고 제주 앞 바다 관탈섬에 다리를 걸칠 정도로 거신이었다.

몸집이 워낙 큰 설문대할망은 마을 사람들에게 치마 속에 입을 바지 한 벌을 해 주면 목포까지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명주를 모아 옷을 만들려고 했으나 가난해 완성하지 못했다.

설문대 할망은 바지가 어느 정도 만들어졌는지 궁금해 내려오다 고지내창에 족두리를 벗어 놓고 물을 마시며 쉬고 있는데, 마을 사람들이 명주가 부족해 옷을 완성하지 못할 것 같다고 얘기했다.

설문대할망은 여기에 실망해 자신의 옷을 만들어 줄 곳을 찾아 족두리도 내버려 두고 떠나버렸다는 설화가 전해내려온다.

이때 벗어 놓은 것이 바로 이 족두리석이라고 한다.

1950~1960년대에는 아이들이 냇가에서 멱을 감다가 놀다가 아프게 되면 어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와서 설문대할망 족두리석 옆에서 치성을 드리고 나면 아팠던 아이가 금세 나아서 뛰어놀았다고도 한다.

2006년에는 마을 주민들이 족감석을 인근 다람쥐 굴로 옮겨 공원을 조성해 이와 관련된 설화와 족감석을 널리 알리자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육중한 무게로 결국 옮기지 못했다.

하지만 오라동 주민들의 힘으로 이 설화가 널리 알려지고 바위가 보존될 수 있도록 표지석을 세웠고, 올레길도 조성해 사람들이 이곳을 지날 때마다 족감석을 볼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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